‘참나’를 알아 자리이타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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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를 알아 자리이타하는 삶
  • 한울안신문
  • 승인 2014.10.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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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울안이 만난 사람 / 홍익학당 윤홍식 대표 - 1



박대성 편집장 (이하 박) : 원불교에서도 일상 속에서의 수행을 강조하는 입장이지만 때로는 중생 제도라는 것을 놓고 ‘모든 것을 여의고 세속을 피해 집중적으로 해야 하지 않는가’하는 생각도 종종 든다. 말씀하신 그래도 중생을 건져야 한다는 ‘덕목’으로 말한 것 정말 세속에서 닦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인지 궁금하다.


윤홍식 대표 (이하 윤) : 진짜 공부는 여기에서다. (세속을 떠나) 가서 하는 공부는 잠깐 피해서 선정(禪定)하는 것뿐이다. 안 닦인다. 아무리 삼매에 들어가도, 에고를 내려놓고 ‘참나’와 하나되는 체험이 아무리 깊어도 에고(ego ;我相)의 문제는 인과법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에고가 닦여야 ‘참나’가 나를 통해 불성으로 터져 나와 원만(圓滿)해진다. 선정에만 치우치면 (그 자리가)편안하고 좋아서 안주하게 된다. 늘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서 불성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면 일상이 선정과 지혜를 닦는 도량이 된다.


그런데 처음에 바로 걸을 수 없으므로 선정의 체험이 일상에서 초월의 체험이 있어야 참나의 안목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 그런 체험이 필요하고 힘이 나고 나면 일상에서 같이 해야 하고 밤에는 좀 앉아서 선정의 밑천이 있어야 한다. 일상과 분리되지 말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박 : 소태산 대종사도 편벽된 수행에 빠져 공적인 활동을 소홀히 한 제자들을 경책했다고 한다. 그런 부분과 일맥 상통하는 말씀이다.


윤 : 그것이 아주 원만하신 관점이다. 삼학이 맞아야 한다. 진짜 수행의 극치는 지혜(智慧)와 계행(戒行)에서 나오는 것이다. 선정의 힘을 기르고 그 외의 시간에는 지혜와 실천을 해야 한다. 남을 만날 때 그 순간에 욕망을 절제하고 올바른 말을 잘 하는 것이 수행인데 이것이 선정보다 낮은 단계라고 보면 수행의 균형이 깨지는 것이고 불성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에고의 선입견이 들어간 것이다. 참나는 그것을 힘들다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박 : 초기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찰나’의 정(定)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한다. (장시간의 삼매 없이 일시적인 몰입만으로도 지혜를 계발할 수 있다는 이론)


윤 : 이 찰나삼매의 몰입으로 일상을 신바람 나게 살면 된다.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희열이 일어난다면 이때의 생각, 감정, 오감은 초연해진다. 그 마음만 정확하게 식별하면 생각, 감정, 오감을 버리지 않고도 해탈이 가능하다. 마치 구름 사이로 태양을 보던, 구름 없이 태양을 보던 태양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는 것과 같이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견성도 마찬가지다. 굳이 사선정(四禪定; 불교에서 말하는 삼매의 네 단계) 경지에 안 들어가도 된다. 구름 속에서도 태양을 보고 구름이 잔뜩 낀 속에서도 태양을 알면 ‘확철대오’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한 체험을 권장은 할 수 있다. 열반이 특별히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지 말라. 생각, 감정, 오감 속에서‘참나’를 식별해야 그대로 해탈하고 불보살이 될 수 있다.


박 : 윤대표께서 인과를 부정하는 영적(靈的)인 가르침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하는데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부처와 같은 존재의 인과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윤 : 몸이 없이 영혼만 있어도 보신이라고 한다. 한 생각도 업보를 가지고 있다. 생각, 감정, 오감 중 하나만 작동해도 보신이고 인과 속에 있는 것이다. 원인이 있어 결과가 있는 것이 현상계의 속성이고, 그것을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참나’의 절대계, 열반계가 아니고는 나머지는 인과 속에 있으니, 해탈도 인과로 풀어야한다. 원인을 제거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들어가면 열반만 가지고는 계산이 안 된다. 열반을 중시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인과가 끊어진다고 보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인과가 그렇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절대계와 현상계는 구별해서 봐야 한다. 현상계의 속성인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절대계에 적용해서도 안 되고, 절대계의 속성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현상계에 무리하게 주장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유무(有無)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고 지혜롭게 아는 것이다. 현상계에서는 인과를 존중해야 하고 절대계에서 인과를 초월하는 것이다.


인과를 끊었다고 하는 것이 인간이 말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해탈했다고 하는 모든 존재들이 해탈하기 전에 해탈했다고 주장한다. 진짜 해탈했다면 말할 수 없다. 누구도 내가 지은 업이 현상계의 존재하는 동안 끝났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다. 해탈을 했다고 해도 이후 밥 먹고 생활하면서 원인 결과를 낳고 있다.


참나 안에 안주하고 있는 상태를 해탈이라고 하는데 절대계 안에서 내 마음이 쉬는 것이지 현상계에서 인과를 쉬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미 (반야심경에) 오온(五蘊)이 공(空)하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절대계와 현상계가 둘 아닌 하나라고 봐야 한다. 인과를 긍정하되 절대계와 둘이 아니라고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 : “‘참나’를 아는 것 보다‘참나’로 살아야 한다.”고 강의 중 말씀하셨는데 아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나


윤: 당연히 알기도 해야 한다. ‘참나’를 아는 것이 견성(見性)이라면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참나’로 사는 것이다.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면 혼자 산에서 수행하면서도 ‘참나’를 알 수 있다. 그것이 돈오(頓悟)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알려면 (세속에서) 점수(漸修)를 하면서‘참나’로 살아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 동서양의 철학과 영성을 조화시킨 강의로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홍익학당 윤홍식 대표(사진 오른쪽, 본지 915호 참조)를 찾아 마음공부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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