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구봉공회 25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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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구봉공회 25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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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6.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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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로주고 섬으로 받은 봉공의 은혜
지금은 봉공회가 국내외 각종 행사와 사업에 앞장 설만큼 발전했지만 내가 회장직을 맡을 때(원기 66년)만 해도 봉공회는 일년에 한번 바자회를 여는 단체로만 인식되어 왔었다.
봉공회 초대 회장은 실은 동아일보사의 김상만 사장이셨으나 너무나 거물급 인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를 위촉한지라 그 분은 한번도 나타나지도 않으셨고 그러한 사실을 아는 교도도 몇 사람 없는 줄로 믿는다. 향타원 박은국 종사께서 고심 끝에 나를 회장으로 택하기로 하셨나 보다.
나는 바쁜 직업여성이었으며 그릇도 아님을 자인하여 몇 번 사양하다가 결국 어른의 말씀을 못이겨 이를 수락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숙명여대 교수직을 수행중이라 두 가지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매우 걱정스러웠으나 맡은 이상엔 책임감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한 달에 한 번 회의만큼은 출석하려고 노력했더니 봉공회 임원들은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봉공회는 교구 사무실 안에 전화만 한 대 갖고 있을 뿐 방도 없고 집기도 없고 도무지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되어 있어서 당시 서울회관 4층에 놀고 있던 방 하나를 얻어서 우선 봉공회 팻말을 거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다음에는 고(古) 가구점에 가서 중고품 소파와 책 걸상 등을 사 들이고 집에 있던 찬장 하나를 내다 놓고 책장으로 활용하는 등 우선 사무실 꾸미기에 힘을 쏟았다. 그랬더니 임원들의 사기도 오르고 일 하기가 좀 편해졌다..
회원들의 사기가 오르니까 다음 목표는 바자회를 봄과 가을에 두 번 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매상이 상상외로 많이 올라 우리 스스로가 놀라기에 이르렀다. 특히 젓갈, 고추, 굴비 등이 효자품목이었는데 이를 싸게 구입하러 임원들이 마산, 제천, 기타 지역으로 원정을 다니고 각 교당 자원봉사자들이 젓갈을 나누어 담고 고추를 분봉하기 위하여 앞다투어 서울회관으로 모여들어 앞치마를 두르고 사심 없이 일하는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고맙고 감동적이었다. 바자 전날에는 대학생 자원봉사자들 까지 동원되어 서울회관 앞마당에 텐트를 치고 당일에는 거의 전교도가 일사불란하게 사고 파는 일을 통해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내가 원불교 교도임에 자부심을 느끼곤 하였다.
돈이 생기니까 봉공회관을 하나 갖는 것이 임원들의 꿈이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서울 교외에 토지를 한 필지 사 놓고 그 땅값이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교단에서 교구를 재조정하는 바람에 서울교구 봉공회가 동서와 경인교구로 나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따라서 봉공회 재산도 각 교구의 교당 수 비례로 분배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결국 그 땅은 팔아서 세 교구 봉공회가 사이 좋게 나누어 가졌고 봉공회관의 꿈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원기 72년 나의 전공을 살려서 봉공회가 아동상담소를 개설하면 좋겠다는 제안이 김재성 총무로부터 나왔고 의견의 일치를 보아 일이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소박한 준비를 끝내고 서울회관 1층에서 내외 귀빈을 모시고 개소식을 갖은 것은 그 해 5월 14일의 일이다. 당시 서울교구장이셨던 좌산 종법사님께서 참석하시어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소년한국일보사의 김수남 사장님이 오셔서 즉석에서 성가 24장 어린이의 노래를 펴들고 시를 낭송하듯 감성을 불어넣어 읽어주신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숙대 제자들이 와서 나를 도와 일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아이들이 모여들어 상담소는 해마다 치료실 하나씩을 늘려야 했고 급기야는 더 얻을 방이 없어서 옹색하게 살다가 드디어 원기 79년에 효산님의 말씀을 따라 밖으로 나와 독립적으로 운영을 하기에 이르렀다.
원광아동상담소를 문열었을 때, 우리 나라는 놀이치료의 불모지였으므로 장래가 매우 불투명하였으나 하다 보니 의외로 정서장애아가 많이 모여들어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의 놀이치료의 효시가 되었고 그 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많은 치료쎈타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강남구에서 새롭게 단장하고 문을 연 후에 뉴욕에서 이 분야의 대가이신 쉐이퍼박사가 와서 보더니 적지 않게 놀라며 많은 칭찬을 하고 돌아간 일도 있었다. 여담이지만 지금은 몇몇 대학에서 놀이치료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을 양성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봉공회의 덕을 보통 본 것이 아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것이 아니라 섬으로 받은 격이 되었다.
사심 없이 하는 일에는 이와 같이 법신불 사은님의 가호가 함께 하심을 굳게 믿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니 나의 신앙심은 반석 위에 올라앉게 되었다. 지금은 은퇴한지도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정기적으로 한국보육원(원광아동상담 센터가 설치해 준 치료실)과 강일동에 있는 한 어린이집(유네스코가 설치해 준 치료실)에 다니며 정서장애 아동을 위한 놀이치료 봉사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보은의 도리를 다 하는 의미에서 나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생각이다. 돌이켜 보면 혈성으로 뭉친 봉공회 임원들, 대동단결하는 각 교당 회원들,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신 교무님들, 자애롭게 지도해 주신 역대 서울 교구장님들과 산하 직원들이 계셨기에 이 사람이 대과 없이 초기 봉공회장의 소임을 마칠 수 있었음을 깊이 깊이 감사드리며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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