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구 봉공회 25년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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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구 봉공회 25년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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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6.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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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원 차원경 " 화곡교당 1대 서부교구봉공회장


제가 원불교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시어머님(관타원 박경국)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화대학에 있을 때 YWCA(기독교단체로 젊은 여성연합단체)에서 기독교 활동을 활발히 했었기 때문에 원불교에 와서 처음 보는 상황은 굉장히 당황된 상황이 많았습니다.
제가 나간 교당은 화곡교당이었는데요, 그때가 원기 57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 교회는 어려웠을 때였지만 굉장히 성장하고 있었고 화려했습니다. 그런데 화곡교당은 거의 가정집에 굉장히 가난하고 어려워 보였습니다. 속으로 ‘어떻게 이렇게 가난하게 운영을 하고 있을까? 이렇게 운영을 해서 교무님께서는 어떻게 살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교도님들도 대부분 어렵고 가난했는데 이제 1백년도 안된 원불교는 굉장히 발전하고 성장한 것이라고 너무나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런 아주 어려워보이는 교당의 모습과 그런데도 즐겁고 기쁘게 법회를 보는 교도님들이 굉장히 인상이 깊었습니다. 그당시 저는 원불교를 다녔지만, YWCA에는 계속 활동했는데 그 이유는 YWCA에서 배울 것이 많았고, 그것을 원불교에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당시 저는 프로그램 기획부에 있었기 때문에 특히 여러가지 바자회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경제적으로 너무나 쪼들리는 화곡교당을 보고 저는 어떻게 해서든 좀 무언가 도움을 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처음 시작한 것이 공동구매와 판매였습니다. 집에서 누구나 쓰는 빨래비누, 세탁비누, 속옷, 식용유, 양복기지 등 갖가지 거의 모든 생필품을 대량으로 싸게 사다가 교당에 두면 교도님들께서 어차피 사야하고 시장에서 사면 비싸니까 교당에 있는 것을 사서 쓰게 됐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조금 이익금을 붙여서 교무님께 드리기도 하고 교당 살림에 작은 보탬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참 잘 됐습니다. 그래서 몇년 째 공동 구매와 판매를 교당에서 잘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기독교에서 운영하던 교도 전체 캠프도 적용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캠프를 떠나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어린이 교화를 위한 꿈밭에 접목되고 창설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 만들어진 부부법회가 현재 30년간 이어와 30주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둥글 부부법회에 함께한 우리들은 합창회, 바자회 등 여러가지로 인연이 되어 혈연보다 더 가까운 법연이 되었습니다.
원기63년 교구 봉공회가 창설되어 제1회 바자회를 열게 된 것은 교구활동을 위해서는 재정을 마련해야 겠고 그래서 바자회를 하자해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그 때 처음 회의장소가 화곡교당이었습니다. 그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람이 많이 와서 그 사람 수만큼의 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긴 사이다 병에 스트로를 꼽았는데 스트로가 둥둥떠서 사이다 병만큼 높이 올라 있고 그것을 모두 사이에 두고 한참 토론을 했습니다. 당시 다른 분들은 바자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들도 많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해, 과연 그것이 성공할 것인지 말이 많았습니다. 그 때, 바자회를 하면서 제가 목표액을 잡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괜히 목표액을 잡았다가 달성 못하면 챙피하니 잡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저는 목표액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목표를 두지 않는 것보다 목표액을 두어야 목표달성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됨으로 목표를 두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순이익을 1백만원으로 하자, 아니다 어떻게 1백만원이나 되는 돈을 이익으로 남기냐 좀 줄이자 하는 말이 많았는데 저는 중학생들이 하는 바자회도 2백만원이 나온다. 전교구가 하는 바자회인데 5백만원은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그러면 3백만원으로 잡자는 등 말이 많았는데 목표 달성을 못하더라도 목표는 높게 잡는게 중요하다고 우겨서 5백만원으로 잡았습니다.
당시 바자회는 봉공회가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는데 절대적으로 재정이 필요했고, 그 재정을 다들 어려운 상황에서 교도 주머니만 소극적으로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 교도님들이 바자회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난처해 했습니다. 그래서 품목을 저와 몇 사람들이 다 정해 주고 물건도 구해 주었습니다.
10월12일부터 13일까지 종로교당에서 열었는데, 그 많은 물품을 겹치지 않고 가능하면 더 싼 구입처를 찾기 위해 굉장히 많은 분들이 애썼습니다. 그 때, 바자회 때 사람이 종로교당에 얼마나 많이 왔는지, 사람들이 내심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거 필시 종로교당이 무너질 것이다. 제발 바자회 때만이라도 잘 버텨주어야하는데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목표액 5백만원을 훨씬 초과해서 7백만원 가량 됐던가요, 평가시간에 너무나 기쁘고 뿌듯해서 말은 못하고 펑펑울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본격적인 사회 봉공활동을 시작했고, 서울사무소에 사무실을 마련했습니다. 한 3회 쯤 되니까 바자회가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정착된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 어려웠던 것은 바자회 상품 선정과 업자 선정 결정과정이 힘들었습니다. 좀더 싼 값에 좋은 상품을 구하고자 각 상품의 원산지를 직접 비행기를 타고 새벽 버스를 타며 쫓아 다녔는데 그 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또 당시 남자 사장님들이 집에 전화를 해서 업무를 보았는데 남편 입장에서 여자에게 남자들 전화가 오니까 오해할 수도 있는데 믿어주고 도움을 많이 주었습니다. 또 아이들을 집에 놓고 일을 하러 다니다가 한번은 밤늦게 집에 와보니 아이들이 고열이 나서 밤새 업고 병원에 갔던 기억, 수도 없이 고생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노력으로 재정을 마련하여 장학금도 주고, 수재민도 돕고 교구나, 교구 여러 활동 단체를 도울 때면 정말 가슴뿌듯하고 기뻐서 그 모든 고생이 달게 느껴졌습니다.
원불교를 만나지 못했다면 제가 어떻게 이렇게 복된 일터를 만나 기쁘고 신나게 일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봉공회 일하던 시절은 언제 생각해도 웃으면서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제는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봉공활동은 교도님들의 고정관념을 변화시킵니다. 함께 봉공활동을 하다보면 ‘함께 한다’는 것에서 굉장한 큰 힘이 생깁니다
. 그것이 표현할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을 줍니다. 또 봉공활동을 하다보면 우물안에 개구리로 살기 쉬운데 밖으로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돌아보면 자신이 굉장히 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봉공회장을 그만두고 말년에 암도 걸리고 여러가지 고생을 했는데 모든 것을 신앙으로 다 이겨내고 이제는 봉공회 활동을 하던 것이 먼 추억처럼 기억이 됩니다. 후배님들이 더 힘쓰셔서 봉공회가 제 역할을 더 충실히 할 수 있도록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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