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법문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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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법문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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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7.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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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원 차원경 " 화곡교당(1대 서부교구봉공회장)
내 젊은 날의 봉공회는 어떤 의미로 자리하고 있나. 내 안의 깊고 넓게 흐르고 있는 봉공회의 역사 중에서 잊기 아까운 몇몇 사연과 인연들을 조심스레 기억의 강둑으로 건져 올려본다.

하나. 보은장날 이야기.
보은 장날의 처음 이름은 보은 바자였다.
젓갈, 고추, 멸치, 생필품....그 한 품목이 판매대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뒷 이야기를 이고 지고 있다.
원기 63년 8월. 늦은 밤에 경남 마산에서 전화가 왔다. 내일 새벽에 서울역에 젓갈 1차분 2,000통이 도착하니 나가서 인수하라는 연락이다.
희뿌연 새벽, 아이들 등교준비 해놓고 살짝 집을 빠져나오는데 남편이 묵묵히 뒤따라 동행해주었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장응철 사무장님께서 먼저 나와 계셨다. 바로 이어 도착하신 ‘운반책’ 서대영 기사님과도 첫 인사를 나누었다. 곧 우리의 젓갈을 실은 화물기차가 도착하였다. 반갑고 설레었지만, 빨리 치워 달라는 역무원의 다그침에 마음만 바빴다. 이 많은 젓갈들이 갈 곳은 어디메뇨? 나와 서기사님의 책임이었다.
먼저 교당 명단과 주문량, 배달방향을 재빨리 정리하여 가득가득 싣고 서울을 골목 골목 누볐다. 다시 서울역, 분류와 배달이 반복되었고, 하루 종일 동서남북으로 다니니 도착지에 내려지는 젓갈이 오히려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배송 방법은 너무나 어려운 점이 많아, 우리는 젓갈을 마산에서 화물 트럭으로 운송하여 서울 교당의 마당 한 켠에 쌓아둔 후 각 교당으로 운반하기로 하였다.
이듬해에는 서울회관을 짓기 위해 마련된 건축현장사무소 옆 구석진 곳에 젓갈 보관을 위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큰 빌딩을 얻은 기쁨으로 감격하였다. 몇 해 후 서기사님은 홍제교당에 입교를 했고, 당시 교구 학생회에 탁구대를 한 대 기증하기도 하였다.
봉공회 바자준비에 결정적 도움을 주신 분은 잠실교당 세산 오영세님이셨다.
오영세님은 상품 선택과 사업방법, 물량조절, 전반적인 운영의 묘 등등 기초적인 영업이론을 쉽고도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제천, 충주, 안동, 마산, 기장, 삼천포, 영광, 춘천....
봉공회 또순이들의 행진이 신들린 듯 전국을 휘몰아쳤다. 그 또순이 중 서울교당 故 순타원 유경수님도 잊을 수 없다. 원기 66년. 봄 계절 상품인 굴비를 가지고 첫 봄 바자를 열었다. 당시 영광교구장(조중정)님께 도움을 청하였고, 영광교구장님께서는 매일 굴비 말리는 높은 장대를 지키시는 굴비지기가 되어주셨다. 당시 서울에서는 그 굴비의 인기가 대단했었다.
원기 70년 경, 우리가 바자의 새 품목으로 고추를 선정하고 구입을 일찍 끝냈는데, 갑작스런 태풍으로 고추값이 폭등했다. 고추 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서로 먼저, 많이 사려고 아우성이었다. 번호표를 나누어 주어 길고 긴 줄을 진정시켰다. 우린 신바람에 콧노래가 절로 났다. 물론 이익도 많았다.
그러나 다음해엔 정반대의 사태가 벌어졌다. 역시 고추 구입을 일찍 끝내놓고 보니 고추가 풍작이 되어 갈수록 값이 폭락하고 교당마다 주문취소가 쇄도했다. 태산같이 남은 고추더미에 준비위원장인 시타원 홍인덕님은 큰 충격을 받으셨고, 눈물과 한숨 가운데에서도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지만, 별무소득이었다. 인심이 야속 그 자체였다.
시타원님은 그때의 두통을 지금까지 앓게 되어 노년의 지병이 되었다.
나는 그 두통에 병명을 지어드렸다. “고추두통”이라고.

둘. 서울 소년원 법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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