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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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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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0.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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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타원 김혜전 " 강남교당
지난날을 회고하며
나의 설익은 나이가 어느새 60.
이제 나도 나의 지나온 세월들을 되돌아 볼 나이가 되었다는 건가.
만약에 내 인생에 원불교와 봉공회가 없었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분명한 것은 지금껏 살아왔던 것과는 다른 모양, 다른 질의 삶이었을 것이리라.
무지하면서도 무지한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며,
이기적이면서도 이기적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며,
한 가정에 머물면서 고작 대중매체를 통해서나 세상을 알았을 터이며,
기껏 남편이나 자식에 기대어 자기평가를 받으려고 하였을 터이다.
남을 공경 할 줄 모르면서도 당연한 듯 그 잘못을 모르고 살았을 것 등등.
지난날을 회고하며, 나를 원불교에 연결시켜주신 법신불 사은님께 감사드리고, 남다른 혜안으로 봉공회 조직을 만들도록 당부하신 대산 종사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또한,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를 믿고 협력해주신 소박하지만 진실되고 순수한 모든 봉공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봉공회와의 첫만남
초가을 햇살이 따사로웠던 어느 날, 40의 나이를 코앞에 두었던 나의 발길은 종로교당으로 향하고 있었고 내 마음은 이것저것을 어지럽게 저울질하고 있었으나 내 몸은 어느새 종로교당 3층 교구 사무실에 당도해 있었다. 그 자리에 먼저 와 있던 홍인덕, 차원경, 유경수, 김재성 님들은 탄성을 지르며 반겨 했었고, 그 날이 바로 나와 봉공회와의 첫 만남의 날이었다. 특히 나와 고교, 대학동창인 차원경의 반가움은 더욱 컸다. 그녀는 나를 봉공회로 이끈장본인이기도 하였다.
그때 그들이 하고 있던 일은 서울 교당에서 곧 개최될 제 3회 보은 바자를 위한 준비작업이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일에 합세하게 되었으며 그 후 수많은 보은 장날을 거치며 느낀 감회는 참으로 가지가지 많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동지들과 몸을 부대끼며 함께 노동하며 느꼈던 그 뿌듯함이라니……. 우리는 그 힘에 겨운 노동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깔깔대며 즐거워 죽겠다는 듯 웃어 재칠수 있었으니 이것이 누가 시킨다고 될 일인가.
내 호주머니에서 덜렁 꺼낸 돈이 아니라 내가 직접 노동을 하고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불행한 사람을 돕고 회상에 유익을 준다니 코끝이 찡- 하고 내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나는 내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원봉공회 탄생
그 당시 우리 임원들은 보은장날 이익금의 일부를 가지고 몇 군데 자선기관을 찾았으며 그곳은 거의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기관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녀와서는 괜히 허망하고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지만 이것이 훗날 사회복지법인 “원봉공회”를 탄생시키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장기적이긴 하지만 좀 더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우리교단 자체 자선기관의 필요성을 실감했던 것이다.
동부교구 봉공회 시절, 김재성 김미진과 나는 봉공회의 장기계획을 위해서 한푼이라도 아끼려 애썼고 우리는 김미진 동지가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며 알뜰을 떨었고 그 당시 동부교구 사무국장이었던 이명신 국장도 봉공회 돈이라면 벌벌 떨면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유린 복지관 건립 때는 1억원을 내 놓으며 교단에 기여하기도 했다. 김재성 동지와 봉공회와는 참으로 사연이 깊다. 그녀는 봉공회 일을 자기의 운명처럼 열성을 다했으며 오늘의 봉공회가 있도록 기반을 닦았다.
통합된 서울교구시절 나는 강경욱 씨가 운영하던 한울안 생협운동이 참 소중한 환경운동임을 깨닫고 그 일을 봉공회가 맡아서 하자고 건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산금의 몇 곱절이 넘는 부채를 안고 있던 생협의 정상화 운영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직원들의 점심 값을 줄이기 위해 담당 교무였던 전명진 교무와 나는 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해 와서 점심을 해결해 가며 애를 쓰기도 했다. 1년 뒤부터 경영은 상당히 호전되었으나, 생태환경악화를 방지하고 친환경적인 건강한 먹거리를 보급하며 구호만이 아닌 실천하는 환경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했던 본래의 내 의도에는 힘이 미치지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로 기억된다. 더욱이 교당판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조적인 상황에서 교당 교무님들께서 신성치 못한 상행위라는 의미와 가격이 비싸다는 등의 이유로 생협 물품 판매행위를 달가워하지 않아 밀려난다니, 사은이 하나로 연계되었음을 강조한 우리 교법으로 전개해야할 새 시대에 꼭 필요한 환경운동에 대한 인식부족이라 생각되어 참으로 서운하다. 다행히 교단의 어른들께서 생협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김덕수 담임 교무를 발령 주시어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기도 하였다. 김 덕수교무와 나는 호흡을 잘 맞추며 서로에게 용기를 주어가며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 나갔다.
무엇보다 먼저 봉공회를 법인으로 등록해야함을 절실히 느낀 우리는 여러 어려운 역경을 이기고 사회복지법인 ‘원 봉공회’로 인가를 받았고 때 마침 닥친 IMF 때 한 역할 톡톡히 하였으며 북녁 사람들을 따뜻이 녹여줄 ‘담요 보내기’등 국가를 위하여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모두 ‘원 봉공회’인가 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신 좌산 종법사님의 배려와 사무국장을 담당하셨던 김도천 교무님의 발 빠른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교구봉공회 회장이 되다
원기79년 서울 교구 봉공 회장이 된 후 7년간 나는 정말로 늘 마음이 바빴다.
어떻게 하면 봉공회를 더 크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사업을 하면 회원들에게 보은하는 기쁨을 안겨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나의 능력은 한계가 있었고 보은 장날에만 의존하고 있던 봉공회의 재정사정 또한 늘 우리들의 손발을 묶었다.
그래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 만큼의 사업이나마 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임원들 간의 결속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나는 임원들을 만나면 용기가 솟고 기쁨이 솟았으며 자신감이 솟아났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희열로 넘치는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다. 이것이 모두 법신불의 위력이 아닐까. 법신불의 위력과 동지들의 협력과 스승님들의 다독임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 긴 세월 그 일을 한답시고 버틸 수가 있었겠나 싶다.
‘보은 즉 불공’이라는 화두를 해결하는 지름길이 봉공회 활동이라 판단한 내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생각하다보면 나는 나의 바쁨을 못마땅해 하다가 나중에는 적극적인 지원자가 되어준 남편 덕산님께 매우 큰 감사를 느낀다.
그리고 철없고 덜 익은 교도시절, 봉공회 월례회에 오시어 법문을 내리시어 이 일이야 말로 교단을 위하여 꼭 필요한 일이며 개인을 위해서도 크게 유익한 일이라고 하시어 후퇴하려던 내 마음을 묶어주신 향타원 박은국 종사님과, 가끔 “지겨워서 그만 할랍니다”고 투정부리던 나를 보고 “천복을 짓는 일인데 왜 안 할라 카노”라며 꾸짖으시던 시타원 홍인덕 종사님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 용기를 주신 분들은 이 회상의 모든 교무님들이었다. 참으로 모든 교무님들을 존경한다. 그분들의 그 알뜰하고도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삶 앞에 우리가 무슨 일을 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을까 싶다. 정녕 힘들고 도망치고 싶을 때 그분들의 삶을 떠올리면서 새로운 용기를 내곤 했다.
세월이 무상하여 이제는 봉공회를 떠나 있게 되었지만, 나에게 봉공회는 영원한 보은의 대상이며 꺼지지 않는 사랑의 대상이다. 그러기에 봉공회를 지켜주는 후진들이 고맙고 대견하다못해 존경스러워 나는 그들을 위해 매일 매일 기도한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다 못한 일들을 잘 해주어 교단에 크게 기여하고 대산 종사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사대봉공회로 키워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또한 봉공회에 바친 나의 열정과 시간과 정성들은 모두가 다 훗날 더 크게 받기 위한 나의 투자였다는 것을 느끼는 지금의 내 심경을 언젠가 그들도 같이 느끼게 되기를 염원한다.
진정 나는 봉공회로 부터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받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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