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 - 다음생엔 전무 출신하리라 ... 김선원 장충교당 교도
상태바
신앙인 - 다음생엔 전무 출신하리라 ... 김선원 장충교당 교도
  • 한울안신문
  • 승인 2005.07.26 0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신 천도는 하고 가야죠"
70년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와 10만원 짜리 전셋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김선원 교도는 76년 금호동에 27평짜리 아파트를 마련, 겨우 짐 정리를 마쳤을 즈음 박명제 교무(현 종로교당. 성동교당 초대 교무)의 방문을 받았다. “금호동에 사는 아무개가 교당을 내고 싶어 한다는데 당신이 맞느냐?”는 것이었다. 교당 전세방을 얻는데 흔쾌히 50만원을 보탠 김 교도는 그렇게 창립주가 되었고 29년의 역사가 시작됐다. # 장충교당 창립주 “150만원 전세방으로 시작해 총 12억이 들어가는 공사를 마쳐 오늘의 장충교당이 있기 까진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죠” 부회장 12년에 이어 교도회장 13년, “성동교당을 팔고 이사 갈 곳을 찾아 눈 내리던 겨울 무릎까지 발이 빠지면서도 성동구 구석구석 안 돌아다닌 곳이 없었다”는 김교도. 2억 3천만원에 성동교당을 팔고 2배가 넘는 5억 2천에 장충교당 터를 계약하면서도 “다 되는 이치가 있지요”라고 말했단다. 이후 전 교도가 똘똘 뭉쳐 코 묻은 돈까지 모았고, 빚을 갚기 위해 젓갈장사에서 쌀장사까지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해야 했던 힘든 시절을 보냈다. “그 때 등짐 져 쌀을 나르다 허리가 망가진 것 같다”는 그는 장충교당 봉불식을 올리고 회장직을 사임했다고. # 영생기도 결제… 장충교당이 완공 된 후 그에겐 알 수 없는 허탈감이 찾아왔고 이어 내린 결론은 “본인이 깡통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새삶회 훈련 한번 안 빠지고, 원창회 훈련, 전국회장단 훈련, 청운회 훈련 등 안 가본 훈련이 없고 사경쓰기를 시작한 지도 20년이 넘어 쌓아둔 사경노트의 높이가 2m 를 넘고 법회출석률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모범교도인 그가 “올곧게 공부한 것이 아니다”라고 반조한 것. “사람들 만나고 조직하고 현실문제 해결하는데 급급해서 정작 내가 부처가 되려는 공부는 소홀했다”고 느낀 그는 자신 천도를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사경은 쓰는 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면서 “교전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쓰고도 모르는 구절은 읽고 또 읽는다”는 그는 “만덕산 훈련 동하선을 다니면서 법동지들의 눈빛에서 ‘성불제중’의 열망을 읽고, 새로운 각도에서 성리에 바탕한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수요 시민선방에서 젊은이들의 서슬 푸른 열정을 배워오고 새삶 법회 역시 빠지지 않는다”는 그는 “내 서원이 부족한 것은 바로 기도정성이 부족한 탓”이라며 5, 6년 전엔 영생기도 결제까지 했다. # 유학 준비하던 딸이 전무출신 지원 … “62년 여동생(옥포교당 김선직 교무)과 함께 대전교당(정자선 교무)을 처음 찾았다"는 그는 입교 후 바로 대전교당 청년회장이 되어 전국청년연합회 1기생이기도 하다. 서울청운회 총무를 맡으면서 전국연합회를 결성했고 이밖에 원창회, 새삶회, 청운보은동산의 핵심멤버로 활동해 왔고 7대 서울청운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부인 정지선 교도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둔 그는 “10년 전 피아노를 전공한 큰 딸(김화종 시민선방 교무)이 유학을 준비하던 중 만덕산 훈련을 다녀와서 ‘결심했다’고 말했을 땐? 감격스러워서 셋이 얼싸안고 울었다”면서 “생사자유로 육도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마지막 서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서원정 기자 swon@won.or.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