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나무골 돈암동회관을 가다
상태바
앵두나무골 돈암동회관을 가다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8.31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기획 / 서울 교화의 성적을 따라서 5



서울특별시에 자리한 원불교 최초교당이 종로구 창신동 605번지에 있었던 경성출장소라면, 서울에서 최초로 신축을 한 교당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 한성대학교 옆 삼선공원 자리에 둥지를 틀었던 경성지부 돈암동회관이라 할 수 있다. 경성지부 돈암동회관 터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가 삼선공원 가는 길을 물어 찾아가면 되는데, 오래된 골목길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길을 묻지 않고는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삼선공원은 지역주민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공원이므로 인근가게 등에 들러 길을 묻는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원기 15년 경성출장소 창신동회관이 회원들의 증가로 장소가 협착해 교화에 어려움이 따르자 소태산 대종사는 전무출신의 길을 걷고자 서원한 이공주 종사에게 출가를 하기 전 서울교화를 이끌어 갈 경성회관을 마련하고 그 유지대책을 세워놓고 나올 것을 주문했다. 이공주 종사는 이에 따라 자신이 살고 있던 계동집을 처분하여 창신동회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고개 너머 경기도 고양군 승인면 돈암리 509번지, 510번지 585평을 매입해 서울 최초 신축교당 터를 마련한 뒤 출가를 단행했다. 경성지부 돈암동회관이 들어설 돈암리 509, 510번지는 낙산 바로 아랫마을로 앵두나무가 많아 앵두나무골이라 불렸다.


하지만 돈암동회관이 신축을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원기 18년 이완철 종사와 이동진화 종사가 부임하면서 부터로, 당시로서는 익산본관에서 오창건 대봉도를 옥사위원(屋舍委員)으로 파견해 감역을 할 정도로 큰 관심을 가졌던 대불사였다. 그해 6월부터 진행된 신축공사는 11월에 마무리 됐는데,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지부 돈암동회관 신축이 마무리 될 때까지 2차례나 상경해 건축 상황을 돌아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대종경 교단품 11장 짐을 지고 역까지 함께 가자는 명을 듣지 않는 제자에게 주신 경책 법문은 돈암동회관 신축 당시 경성지부 교무였던 이완철 종사에게 해 주신 법문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새롭다.


원기 18년 11월 23일 5개월여의 공사 끝에 경성지부 돈암동회관이 낙성하고 봉불낙성식을 거행했다. 건물은 일식과 양식을 절충한 신식 건축물로 법당은 총 12칸, 미닫이문을 통해 3개의 공간으로 분리가 되어 있는데, 문을 모두 열면 3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특히 식당과 사무실, 숙소가 있는 기존 별채 건물이 따로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교당 규모는 무려 20여 칸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건축경비는 창신동회관을 처분하고 받은 750원과 후원금으로 들어온 2천여원이 소요되었으니 돈암동회관 신축불사는 당시 교단 경제로서는 쉽지 않은 대불사였다.



경성지부 교무였던 이완철 종사가 봉불낙성식 당시 남긴 기록을 엿보면 “만장 풍진을 벗어나 솟아있는 낙산의 웅자, 동편의 성곽과 늙은 소나무 숲, 울창한 과수림, 맑은 시냇물과 주변의 반석 등 무릉도원 같은 곳으로 가끔 성북동 길로 달리는 자동차 소리와 창신동 쪽 전차소리가 들려왔다”고 주변 환경을 소상히 적고 있다. 이완철 종사는 또 “법당건물은 함석 차양에 황색페인트 칠이 아름다워 한 폭의 그림 같은데 대문 앞에는 자연석이 ‘수양원 입구’라고 쓴 조송광 교무의 멋진 붓글씨가 빛이 났다”며 “다만, 아쉬운 것은 위치가 외져서 교통이 불편한 것과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 이 두 가지” 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렇게 봉불낙성을 한 경성지부 돈암동회관은 이후 원기 31년(1946) 2월 회관을 팔고 한남동 정각사로 이사를 갈 때까지 이완철, 발제봉, 이군일, 서대인 교무 등이 교화활동을 펼치며 13년 간 서울교화의 심장부로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당시 등기부등본과 토지대장에 의하면 돈암동회관은 원기33(1948)년 서울시로 이전되어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크게 늘어난 고아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이용되었고, 고아원이 없어진 후에는 부랑아들을 수용해 직업교육을 시키는 시설로 활용되다가 1981년 이 일대를 삼선공원으로 재정비 하는 과정에서 남아있던 건물들은 모두 헐어버린 것으로 짐작된다.


몇 차례 골목길을 헤매 삼선공원에 다다르니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서 감자 순 껍질을 벗기며 단소를 나누는 어른신들, 정자에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그리고 곧바로 둥근 일원상과 함께 시야에 들어오는 ‘원불교 서울 최초 신축교당 터’ 기념비. 원기 83년 서울보은회가 서울지부 신축 65돌을 맞이해 세웠다는 이 기념비에는 ‘원기 18(1933)년 원불교에서 서울지역 최초로 신축교당을 설립하여 현 원불교 서울교화의 모태가 되었던 자리다’는 비문이 실려 있다.


주위를 한바퀴 휘 둘러보니 기념비 앞쪽으로는 한성대학교 건물이 보이고 오른편에는 조선시대 삼군부 청사 중심건물이었다는 총무당이 옛 역사를 말해주듯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다. 현 정부 종합청사 자리에 있던 것을 1930년대 이전 복원한 것이라 하니 그 역사가 돈암동회관이 신축되던 시기와 엇비슷해 보여 감회가 남달랐다. 총무당 뒤편으로는 삼선어린이집과 놀이터가 자리하고 있고 골짜기 오른 편 위쪽으로는 옛 자취를 말해주는 듯 서울 성곽의 아름 다운 자태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 내린다. 그 아래로 산등성이 따라 미로같은 작은 골목들을 수없이 만들어 내며 성냥곽처럼 따닥따닥 붙어 수십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낡은 집들을 둘러보며 앵두나무골 돈암동회관의 옛모습을 그려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