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5주년 특별좌담1] 포스트 코로나, 종교의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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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25주년 특별좌담1] 포스트 코로나, 종교의 길을 묻다
  • 강법진 편집장
  • 승인 2020.05.05 11:35
  • 호수 11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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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신문 창간25주년 특별좌담1

 

코로나19는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뉴노멀 시대를 요구하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105년 전,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화두를 던지며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사은(四恩)의 은혜를 밝혔다. 전 세계를 위협하는 코로나19는 은혜를 입고도 은혜인 줄 모르고 살아가는 인류에게 던지는 엄중한 메시지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개벽, 기후위기인가 지구살림인가. 지난 4월 23일 교단 내에서 지구살림 녹색운동을 펼치고 있는 세 명의 패널을 초대해 ‘포스트 코로나, 종교에 길을 묻다’란 주제로 좌담회를 가졌다.

사회자는 따로 두지 않고 사전질문지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패널에는 나나(이태은·원불교환경연대 나이만큼 나무를 심자 사업단장), 소란(유희정·퍼머컬처), 허큐(허성근·녹색정치활동가·원불교청년회 부회장)가 참여했다. 이하 별칭을 쓴다.     

정리=강법진 기자

 

 

오랜만이다. 요즘 어떻게 지냈나

소란=농사꾼이라 코로나가 있든 없든 봄에는 씨를 뿌려야 해서 바빴다. 대신 부수적인 일이 줄어드니 농작물로 요리해 먹는 시간이 길어졌다.

허큐=안동청년공감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는데 대구경북지역에 확진자가 많이 발생해 활동이 거의 중단됐다. 그래도 은생어해(해에서 은혜를 발견)의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나나=코로나19 발생 초기에 해외에 나갔다가, 한국에 들어와 2주간 격리생활을 했다. 집콕하면서도 우리가 굉장히 초연결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혼돈 속에서도 기후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보았다.
 

코로나19 창궐은 인간의 무분별한 욕심이 빚은 결과라고 한다. 어떻게 보는가

허큐=바이러스에 대해 완전한 정답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로 바이러스도 증가했지만 인간의 면역력도 그만큼 약해졌다. 코로나 앞에서 재벌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 제2, 제3의 코로나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전환이다. 또 한편으로는 원불교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사은을 말하는데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은혜가 될 수 있는가.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삶의 노동현장에 나가야 하고, 자가격리자가 생계현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현실, 우리사회의 부조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정치·경제 시스템의 변화가 절실하다.

소란=그동안 우리는 기후위기를 쉬지 않고 얘기해왔지만 코로나19 사태로 그 이야기도 잠깐 멈춘 상태다. 지구가 스스로 자정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서 인과가 극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기후위기에 대한 메시지는 많았다. 그러나 물질만 쫓다가 정신이 따라가질 못했다. 코로나 창궐로 내 삶에 밀접해지니까 이제야 기후위기, 생태계 파괴를 이야기하고 있는 형국이다. 좋은 기회이지만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다.

나나=어찌보면 인간이 너무 바보 같다.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다른 생명체를 해치고 지금의 사태를 불러왔다. 우리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생태운동을 하면서 생태계가 피라미드가 아니라 원의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원은 인간의 에고(ego)이면서 에코(eco)이다. 인간이 지구를 살린다는 것도 사실 오만이다. 인간이 지구에 어떻게 붙어살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인간이 바이러스이고, 코로나가 백신이란 말도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맞다. 많은 사람들이 각성한 것 같지만 한두 번은 더 갈 것 같다.

소란=백신이 개발되고 이 사태가 극복된다고 해도 자만하면 안된다. 물질로 얻은 인간의 행복이 얼마나 갈까. 욕망의 방향을 영적 성장과 정신개벽으로 돌려야 한다.

나나=우리는 이제 기존의 일상에서 벗어나 삶을 다르게 향유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종교가 그 좌표가 돼야 한다.
 

젊은 세대 정치활동가로서 어떤 가능성을 내다보는가

허큐=적어도 기후위기면에서는 한국정치계의 속도가 느려서 절망이다. 이번 4월 총선은 특정세력에 대한 심판이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대안은 없었다. 내가 속한 정당이 기후위기 정책을 단독으로 걸었는데 표는 많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국민들이 보내준 표는 정세가 어떻든간에 녹색의지에 대한 지지라고 본다. 결국 지역에서 전환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대종사께서 한국은 정신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이 된다고 했다. 이번 코로나19 대응에서 보여준 한국인은 어땠나

나나=정치인은 민심을 무겁게 알고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가 이번 코로나19를 극복하면서 시민들의 역량을 보여줬다. 한국인의 단결된 모습과 어려울수록 이웃을 돌보는 마음, 의료체계가 세계에 드러났다. 오히려 극강의 자본주의가 민낯을 드러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말씀하신 한국이 정신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이 된다는 뜻을 잘 믿지 않았는데 요즘은 체감한다. 다만 무엇으로 책임질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는 고민이 깊다.

허큐=정신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이 저절로 될 리 없다. 우리의 본성에는 불성이 갊아 있지만 계속 닦아야 하듯이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과거에 세월호로 얻은 뼈아픈 학습효과가 있다. 그로 인해 위기대처능력이 좋아졌다. 엄밀히 말하면 시민들이 만들어낸 성과다. 그러니 국난 극복을 애국 프레임에 가두지 말고 아시아의 선진국으로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를 도와 세계평화로 가는 데 기여하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 그것이 보은행이다.

소란=나는 ‘국뽕’을 아주 싫어한다. 한국사람들이 경제성장하면서 물질적으로 성공했지만 기후위기에 관련해서는 죄(탄소 배출 등)도 많이 지었다. 어쨌든 한국인의 성실함이 이번 국난 극복에 힘이 됐고, 그 성실함 뒤에는 공동체와 나의 가족에 대한 존중이 깊이 뿌리했다. 우리는 굉장히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그 공동체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욕구를 높여서 소외계층을 줄어야 한다.
 

전 세계 팬데믹 현상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다. 원불교는 어떤 해법을 줄 수 있을까

나나=미국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세계는 지금 기본소득 실험 중이다. 노동 없이도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기본소득은 더 이상 하나의 정책이 아니다. 혹자는 재원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묻겠지만 국방비 10%만 전환해도 가능하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재난소득을 제공받았다. 고용과 노동과 삶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를 코로나19가 가르쳐줬다. 경제의 개념을 자본주의가 아니라 고르게 잘살기 위한 사회시스템으로 정착하면 가치 있는 사회적 기업이 더 늘어나고 그런 사회일수록 종교·문화·예술·철학도 발달할 수 있다. 원불교가 미래를 향유하는 종교문화를 만들었으면 한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법회 보는 곳이 많이 늘었는데 기존 오프라인에서 법회 보듯이 하면 안된다. 만나지 않아도 만난 것처럼 해야 온라인에서 감동을 준다. 보다 획기적이고 재밌게 혹은 진중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

허큐=교법이 주는 가치 지향성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런데 불법활용이 잘 되고 있는가 돌아보자. 대종사께서도 깨닫고 난 뒤, 영산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아주 구체적으로 실천했다. 그 정신이 <정전>에 담겼다. 이제는 우리가 <정전>의 내용을 시대에 맞게 활용해야 한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있어야 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해 ‘사람들을 보살피면서’ 확장해 가야 한다. 우리는 소수종교다.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나가자. 두려워 말고 과감하게 나가자. 모든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가 위축되면 사회가 망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있다. 그런 담론전환에 목소리를 내는 곳이 종교여야 한다.

소란=종교의 힘은 언어에 있다. 코로나 정국에도 원불교가 아무런 메시지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메시지를 자신감 있게 내자. 물질을 자본으로 바꾸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 메시지가 나온다.
 


알면서도 실천이 어렵다

허큐=원불교가 4대 종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소수종교로 가야 열린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소수정당이 거대정당을 따라 가려고 하면 표를 못 얻는다. 영생을 내다보는 종교라면 교화(교도) 숫자로 평가하면 안 된다. 행정기관에서는 할 수 있지만 그런 평가가 실무자에게 가는 것은 반대다. 결정단위에서 과감하게 떠들어줘야 대중이 주목한다. 기성종단과 격식을 맞추기보다 과감하게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야 사람들이 쳐다본다. 소수종교가 가진 장점은 거침없음에 있다.

소란=종교에서 교세를 중시하는 것은 성장하려는 욕구와 그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려는 욕구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내려갔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집착하게 된다. 조직이란 집착하는 순간 위계가 생긴다. 그러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힘들어도 말하지 않는다. 유럽에 있을 때, 그 많은 교회가 신자 없이 주말 예배만 보니까 평일에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명상회도 하고, 마을 바자회도 하고, 때로는 디스코텍으로 열어주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곳에서 춤을 출 수 있어 좋다며 공간을 빌려준 곳에 보답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마을공동체와 긴밀한 유대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20~30대 젊은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유튜브로 명상을 한다. 내가 전문수행인(성직자)은 아니지만 원불교에서 배운 교리와 마음공부를 알려준다. 코로나로 서로 만나지 못했을 때는 유튜브로 만나 참회문을 외며 반성했다. 사실 참회할 것도 없는 젊은이들이 눈물을 줄줄 흘린다. 교리(종교의 언어)의 힘이다. 의정부 수락훈련원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는데 원불교 교리는 몰라도 무척 고마워한다. 오다가다 그들이 듣는 게 원불교 교리 아니겠는가. 이처럼 연결고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메시지여야 한다.
 

수많은 종교 중에 나는 왜 원불교에서 희망을 보는가

나나=원불교환경연대에서 4월 대각의 달을 맞아 매일 ‘불을 끄고 마음을 켜는’ 기도운동을 했다. 이웃종교인이 세상에 좋고 필요한 것은 원불교가 다 한다고 하더라. 원불교는 세상을 향한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대종사께서도 천의를 감동시킬 요소가 우리 각자의 마음에 있다고 했다. 원불교환경연대가 10년이 됐는데 이제는 교단의 흐름을 바꾸는 힘을 가져야 한다. 시민사회는 그런 역동성이 있다. 재가단체나 시민단체가 대종사의 가르침을 잘 구현하고 좋은 사례를 만들어내는 말랑말랑한 조직이 돼야 한다. 기후행동에 있어서도 이웃종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원불교환경연대가 길을 내고, 교단을 움직여서 하나의 메시지가 되게 해야 한다. 교화란,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물질개벽, 정신개벽을 각자의 몸속에 넣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되지 않겠나. 글자나 숫자에 갇히지 말자. 나는 원불교가 생태지향적인 교단이 되길 바란다.

허큐=원불교에 바람이 있다. 원불교에는 지자본위 정신이 있다. 교무님들이 모든 지식이나 경험을 다 갖출 수는 없다. 그래서 의사결정단위에 재가교도들을 많이 참여시켰으면 한다. 청년교화를 걱정하는 그룹에 청년들을 배치해 주지 않는다. 물론 세대가 가진 힘이 약하긴 하지만 그것은 차차 키워가야 하는 문제이고, 어설프더라도 기회를 주고 공간을 열어줘야 한다. 청년·청소년 중요정책에 나이어린 청년들이 자리에 앉아 떠들게 해야 한다. 재가교도들도 마찬가지다. 공간을 열고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주체에게 힘을 주면 그 파급력은 굉장히 빠르다. 교단의 힘은 거기에 있다. 사실 원불교 교법으로 시민사회, 공익활동에 진로를 고민하던 친구들이 무수히 좌절하고 데뷔도 못했다. 그런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한다.

소란=원불교 자체가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가 돼야 한다. 당장에는 의미가 없어보여도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해줘야 한다. 나는 개벽의 언어가 불편하다. 개벽이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쌓여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환이란 말을 쓴다. 코로나19를 맞이했지만 우리는 아직 개벽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되어 갈 것으로 믿는다. 개벽하려면 계속 희망을 얘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하면서 계속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 언어의 힘이다.
 


내가 바라는 종교의 모습은

허큐=모든 조직이 급진적일 수는 없다. 기본소득도 대한민국 전체로 하면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지자체 한두 군데 정도가 돌발적으로 한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무너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500개 교당 중에 50개 정도는 지역성을 떠나 시대에 맞는 의제들을 실행하는 특색있는 교화를 시도해보면 좋겠다. 서울 향린교회는 성소수자, 남북문제 등 시대 아젠더를 다루는 교회가 있다. 우리도 그런 특색있는 교당을 만들어 정책적으로 밀어주면 좋겠다. 진보와 보수가 양날개를 펴듯이 5%, 10%는 실험하게 해야 한다. 그런다고 근간이 흔들리지 않는다. 과정은 어렵겠지만 지도부의 결단이 필요하다.

나나=마을마다 선방을 만들어 우리의 삶을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면 좋겠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은 대구지역에 봉공회 밥차가 밥을 해주었는데 이러한 봉공활동이 이 시대에 맞는 종교의 역할이란 의미를 부여해 줘야 한다. 봉공회의 당연한 일로 바라보면 안된다. 면 마스크 제작도 그렇다. 원불교환경연대에서 실천하는 대각개교절 15분 불 끄기, 수락텃밭 만들기 등 현장활동들이 이 시대 종교의 역할로 의미 지어지게 해야 한다.

소란=의식의 전환은 정확한 행동으로 보여줄 때 이뤄진다. 북극곰의 눈물을 보면서 함께 눈물을 흘릴 수도 있지만, 종교는 눈물을 흘리지 않게 사람들의 의식과 삶을 전환해 줘야 한다. 원불교가 훌륭한 것은 사은의 은혜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기후위기와 코로나바이러스는 천지은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이다. 자연이란 가장 물질적이면서도 영적인 것이다. 이것을 분리하지 않고 통섭하여 완전히 이해할 때 물질을 영성으로 풀 수 있다. 그러려면 교리가 쉬운 언어로 다가가야 한다. 쉬운 언어라야 쉬운 행동이 동반된다.

나나=원불교 일상수행의 요법은 쉬우면서도 굉장히 핵심적인 통찰이다. 매일 이렇게 수행한다면 성인이 아닌가 싶을 만큼 놀랍다. 이런 교리를 일상(생활)언어로 자주 써주면 좋겠다.


나는 어떤 삶을 꿈꾸는가

허큐=교법을 지역사회의 공익으로 실현하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 대종사께서 대각하고 영산·익산 공동체를 건설해 개벽을 이뤘듯이, 고향 안동에서 전환운동을 펼치려고 한다.

소란=지금처럼 살 것 같다. 그런데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해서 일은 덜 했으면 한다. 나는 개벽이 이뤄진 낙원세상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싶다. 행복한 낙원세계는 자기와의 싸움·고뇌 속에서 올곧게 지켜나갈 때 가능하다. 원불교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생각이었다.

나나=계획을 세우지 말자가 계획이다. 나의 면역력을 세우는 것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란 것을 알았다. 정신과 육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걷다가 어느 순간 한 소식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작지만 큰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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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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