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산 전성완 원정사 전 고사③] 바라만 봐도 좋았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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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 전성완 원정사 전 고사③] 바라만 봐도 좋았던 아버지
  • 전정희 교도
  • 승인 2020.05.2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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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 전성완 원정사 따님

아버지,

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세상에 나오니, 어느새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영국의 시인 엘리어트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는데, 개나리, 벚꽃, 진달래가 만발한 그 어디에도 아버지를 모시고 갈 수 없는 이 4월이 저희들에게도 정말 잔인한 달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꽃구경을 다녀오곤 했는데 이제 아버지 안 계신 그 자리가 너무나 허전할 것 같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좋은 풍광을 마주할 때면 ‘다음에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또 와야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었는데 이제는 그런 곳에 갈 때도 아버지 안 계신 아쉬움에, 그리움에 가슴 한켠이 아려올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적에 아버지는 저에게 웅변을 가르쳐주셨지요. 딸, 아들 차별이 확연하던 시대에, ‘다른 집 열 아들 부럽지 않다’시며 직접 원고를 써주시고, 말하는 법, 억양, 몸짓까지 세세하게 지도를 해주셨기에 지금까지 남 앞에 서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고, 국회에서 의정활동을 할 때도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늘 가슴에 두고도 미처 드리지 못했던 말씀, 아버지 병상에서 수없이 홀로 드렸던 말씀을 이제 소리내어 전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린 시절, 모르거나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아버지께 여쭤보면 언제나 명쾌하게 가르쳐주셨던 아버지. 저희들은 세상의 아버지들은 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전기 다루는 일을 비롯해서, 직접 마루를 놓으시고, 문도 만들어 다실 만큼 만능이셨던 아버지. 저희들은 또한 세상의 아버지들은 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어느 뜨거운 여름 날, 지붕위에 오르셔서 땀범벅이 된 채, 기와를 살피시던 아버지의 그 든든했던 모습. 그 모습들이 저희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잔상으로 깊게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독학으로 컴퓨터를 익히셔서 저희들을 깜짝 놀라게 하셨지요. 4촌까지 모든 가족들의 생일을 컴퓨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셔서 서로간에 잘 챙기라고 나누어 주기도 하셨습니다. 좌산상사님, 경산상사님의 책들을 일본어로 번역하시느라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도 컴퓨터 앞에 앉아 계시던 모습, 지금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버지의 그 뒷모습이 금방이라도 보일 것 같습니다.

언젠가 만난 한 중학교 선생님은 자기가 원광여중에 다닐 때 아버지 훈화 말씀을 들으면서 나중에 저런 선생님이 되어야지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원광보건대학교에 교수로 있는 제 초등학교 동창은 “그 대학의 교수님들이, 지금은 총장이라고 부르는 전임 학장님들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고, 다시 한번 그런 총장님이 오셨으면 좋겠다고 한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제가 의원 생활을 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참 훌륭한 어른’이라고 하면서 아버지 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호감을 표해주었습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훌륭한 평판’이라는 귀한 유산을 물려주신 아버지, 저희들 또한 그 유산을 후대에 물려주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버지,

한 번도 사랑한다고, 귀엽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어도 늘 그 깊이 모를 사랑을 느끼게 해주셨던 아버지. 매월 보내드리는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다시 자식들에게, 손자들에게 꼭 필요할 때 건네주시며 격려해주시던 아버지. 작년 가을, 병상에 계시면서도 선거에 나갈 때 보태라고 적지 않은 금일봉을 제게 건네주셨지요. 편찮으신 가운데서도 저를 걱정해주시고, 또 그것이 얼마만큼의 검약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기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저는 선거에 출마하는 대신,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떠나신 지금, 그것이 얼마나 잘한 결정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검약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삶의 자세셨습니다. 다 쓴 편지봉투조차 뒤집어서 쓰실 만큼 검약한 생활을 하셨지만 저희들 공부하는 데는 또한 아낌이 없으셨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 사립 초등학교에 보내주셨고, 고등학교에 갈 때, 대학에 갈 때도 당시 형편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기꺼이 저를 전주로, 서울로 보내주셨습니다. 양복 한 벌, 구두 한 켤레로 지내시면서도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말씀, “네가 공부하고 싶은 데까지 밀어주마.” 그렇게 제게 더 넓은 세상에 나가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을 키울 수 있도록 해주셨던 아버지셨습니다.

짧은 거리든, 먼 거리든 어디를 모시고 다녀올 때면 꼭 수고했다는 말을 잊지 않으셨던 아버지. 차에서 내리셔서도 먼저 들어가지 않으시고 차가 떠날 때까지 꼭 그 자리에 지켜서서 배웅해주셨던 아버지. 자식이라도 결코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저희들에게 “형제간의 우애”를 당부하셨습니다만, 아버지 형제들의 그 깊고 깊은 우애를 보면서 형제는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이미 알았습니다. 매일 매일 순번을 정해 아버지 병상을 지키면서 저희들은 더 끈끈한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떠나시면서도 저희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셨던 아버지의 깊은 뜻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평생을,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살아오신 어머니는, 이제 저희들이 잘 모시겠습니다.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셨던 그 정성스러움과 지극함을 이미 보았기에 저희들 역시 그렇게 어머니를 모시겠습니다.

일찍,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셔서 동생들 가르치고, 저희 6남매를 키우시느라 그 훌륭한 재능으로도 미처 꿈을 펼치지 못하셨던 아버지. 이제 피안에서 잠시 쉬셨다가 다시 오시어 이생에서 못다 이루셨던 아버지의 꿈을 맘껏 펼치시옵소서.

아버지, 그냥 바라만 보아도 좋았던 아버지. 

아버지의 딸이어서 자랑스러웠습니다. 아버지의 딸이어서 행복했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으로 보여주셨던 아버지, 원불교 교법과 대종사님 정신을 하늘처럼 여기시고, 나이 어린 교무님들에게도 꼭 섬김의 예를 갖추셨던 아버지. 전무출신의 길을 가지 않으셨어도 출가보다 더한 절제와 수행으로 평생을 일관하셨던 아버지.

존경했습니다. 사랑했습니다. 아버지,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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