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떤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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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어떤 기억
  • 정형은
  • 승인 2022.04.28 17:00
  • 호수 12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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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은 여의도교당 교도(사)평화마을짓자 이사장
정형은 여의도교당 교도(사)평화마을짓자 이사장

196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선배는 점심 도시락을 못 싸 와 자주 배를 곯았다.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을 맴돌다가 수돗물로 물배를 채우며 들어오곤 했다. 당시 그런 일은 흔한 일이어서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점심 못 싸 온 사람 손들어”라고 묻자 선배는 별생각 없이 손을 들었다. 그런데 평소에 도시락을 못 싸 오던 다른 친구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은 선배를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반장을 시켜 빵과 우유를 사 오라고 해서 먹으라고 했다. 선배는 머뭇거리며 몇 번씩 사양했지만, 담임 선생님은 괜찮다고 기어이 아이들 앞에서 혼자 빵과 우유를 먹게 했다.
이 일은 이후 서로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게 되었을까. 아마 담임 선생님에게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선의를 베푼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배는 그날 이후 음식을 먹고 싶다는 느낌을 평생 잃어버렸다. 후배들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자고 너스레를 떨어도 그저 따라가서 몇 숟갈 들 뿐 먼저 뭘 먹자거나 맛있다고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선배가 귀농하여 농사를 짓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예전에 출간된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이 글을 보고 나는 뜻밖의 놀라움 속에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는 아무리 좋은 뜻으로 좋은 일을 할지라도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 어떤 것을 진행하고자 할 때는 역지사지로 생각해보고,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여 “이러면 어때?”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이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자주 만나고 가깝다고 하더라도 서로에 대해 얼마나 깊은 대화를 나누는가에 대해 심각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삼십년 넘게 함께해온 선배의 삶과 그 여정에서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떠난 후에야 알게 된 것처럼, 우리는 자주 만나도 일상 대화, 가벼운 안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정도로 매우 ‘제한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배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운 친구, 부부, 형제자매, 부모님과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정작 그 사람의 어린 시절, 꿈과 희망, 성취와 실패, 좌절과 고민 등을 얼마나 깊이 나누고 있는 걸까.
가끔 인터뷰할 일이 있는데, 한두 시간 만에 정말로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 사람의 일생에 대해 압축적인 이야기를 그 사람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듣게 된다. 일상 속에서는 묻지 않아서 말할 일이 없을 그런 이야기가 술술 터져 나온다.
머잖아 어버이날이다. 구순을 넘기신 아버지 생애를 자손들과 친지들, 제자분들과 나누고 싶어 전시회와 회고록 출판기념회를 열기로 했다. 일곱 딸들이 회의를 몇 차례 열어 더 늦기 전에 아버지 삶에서 소중했던 분들을 초대하고 만남의 자리를 갖기로 했다. 우리가 아버지의 삶을 더 깊이 알고, 소중했던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오랜 시간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아버지의 삶을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해, 자리이타로 생애를 열심히 사신 아버지를 공통의 기억으로 조각을 맞춰보려고 한다. 딸들을 한명 한명 고루 사랑하시고 최선을 다해 키워주신 아버지를 위한 최소한의 예우를 다하고 싶다.
오월 가정의 달, 누구나 부모은에 보답하고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면 참 좋겠다.
4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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