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너와 함께라면 어디 가든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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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너와 함께라면 어디 가든 좋아
  • 정형은 (사)평화마을짓자 이사장(여의도교당)
  • 승인 2022.11.30 09:07
  • 호수 12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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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칼럼

이런 대사를 누군가에게 들어본 적이 있는가. “너와 함께라면 어디 가든 좋아.” 연인도, 남편도, 자식도 아닌, 아버지가 내게 하신 말씀이라니…. 북한산 밑으로 이사할까 하는데 어떠시냐고 여쭈었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가볍게 이사했다. 모처럼 영화를 보려고 친구들에게 전화 거는데 다들 바빠서 약속도 못 잡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오랜만에 아버지와 영화를 보러 갔다. 그래서 꽃구경도, 한강 물놀이 구경도, 그림 전시회도, 직장 다니는 동생을 불쑥 찾아가 점심도 얻어먹고 다녔다.

지난 5월 아버지 구순 기념 전시회를 열고 회고록을 출판했었는데, 친구분들은 연로하셔서 오지 못하셨다. 그래서 연락을 드리니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던 아저씨가 무척 반가워하셨다. 최근 몇 년간 친구분들과 교류가 끊겼던지라 아버지를 모시고 아저씨 댁 가까운 곳에서 점심을 먹고 공원을 산책했다. 아저씨는 아버지 손을 잡고 한참 바라보시며 “우갑아, 우갑아” 몇 번씩 이름을 부르셨다. 다정하게 손잡고 공원을 몇 걸음 걷다가 의자에 앉고 다시 또 걸으며 옛날이야기를 하시면서 두 분은 80년 전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은 경기도 얼굴박물관에 계시는 친구분을 방문하는 네 분 동창의 상봉으로 이어졌다. 구십이 넘어 몸이 불편해도 기억이 생생한 두 분의 이야기가 무궁무진 끝도 없이 추억을 불러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비도 오고 날도 저물어 광화문 뒤쪽 감자탕 집 젊은이들이 가득 찬 곳에 앉아 옛날처럼 술도 한잔하시니 더욱 기분 좋다고 하셨다.

문득 오래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님 팔순 때 어머님이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분을 만나러 모시고 다니던 생각이 난다. 결혼하고 세 번밖에 못 만난 이모님을 뵈러 가고, 가고 싶은 절에 모시고 가곤 했었다. 눈물을 왈칵 쏟으며 회포를 푸시고, 절에 가서 공들여 기도하고 오시면 한동안 어머님 얼굴이 빛나며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구십이 넘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어떤 지인도 뻔한 일상을 벗어나 태국 바닷가로 여행을 여러 날 갔다고 했다. 바닷가에 앉아 사람들을 보고 새로운 음식을 맛보며 구경하다가 오시면 한동안 건강과 기분이 좋아지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들의 우려를 안심시키며 정정하고 기억력도 대단하신 그 아저씨와 아버지와 셋이서 제주도 여행을 결행했다. 몇 년 전 제주에 정착한 내 친구가 아버지에게 바다와 산과 오름이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맛난 음식도 드시라고 여러 번 권한 것도 힘이 되었다. 아버지는 물론, 제주도에 가본지 오래되었다는 아저씨도 무척이나 좋아하시며 수학여행 때처럼 흥분된다고 하셨다. 느릿느릿 걷고 하염없이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숲 속에서 두 분을 앞에 두고 친구와 나는 재롱잔치를 벌였다. 넷이서 옛날 동요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자니 떠들썩 웃음꽃이 만발했다. 친구와 나는 45년 지기, 아버지와 아저씨는 80년 지기라서 각기 동창회를 하는 기분이었다. 머잖은 우리의 미래를 두 분에게서 보며, 어떻게 노년을 보내야 할까 절로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 걷기 힘들어하시던 아버지는 사나흘 지나자 전보다 훨씬 원기 왕성하게 기억력도 좋아지시고 새로운 어휘를 쓰시며 기분 좋게 지내신다.

고령인 부모님께 어떻게 해드려야 할까 망설여진다면, 걸어오신 인생을 돌아보며 추억을 되살리도록 동행해드리는 게 어떨까 추천하고 싶다. 나 역시 언젠가 모든 게 불편해지더라도 내 인생의 소중했던 사람들을 만나는 추억 여행을 꼭 하고 싶다.

12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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