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당신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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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당신의 전성기
  • 정형은
  • 승인 2022.06.02 19:20
  • 호수 12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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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은 여의도교당 교도(사)평화마을짓자 이사장
정형은 여의도교당 교도(사)평화마을짓자 이사장

1979년 ‘추억에 대해 심오한 토론을 할 사람을 모집’하여 선정된 미국의 7,80대 노인 여덟 명이 시골의 외딴집에서 일주일을 보낸다. 집안에는 20년 전에 유행한 음반, 영화 포스터, 당시의 TV 프로그램 등이 재현되고, 규칙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20년 전으로 돌아가 그때처럼 생활하는 것, 또 하나는 청소와 설거지 등 집안일을 직접 하는 것이다.

노인들은 1959년의 환경으로 꾸며진 집 안에서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이 발사되는 장면을 흑백TV로 보고, 카스트로의 아바나 진격 등 1959년 당시의 시사적인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냇 킹 콜의 노래와 마릴린 먼로 주연의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를 즐겼다. 가족이나 간병인의 도움 없이 무엇을 먹을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요리와 설거지, 청소 등 그동안 제지당해 하지 못했던 육체적 활동을 하며 일주일을 보내자 지팡이를 벗어던지고 말문이 트이며 시력, 청력, 지능, 기억력 등이 20년이나 젊어지는 놀라운 효과가 생겨났다, 모든 것이 왕성했던 20년 전의 추억을 소환하는 것만으로 믿을 수 없는 신체적·지적 변화가 일주일 만에 나타난 것이다. 이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으로 앨렌 랭어 교수는 단숨에 유명해지고 하버드대 최초의 여성 종신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 구순이 된 아버지의 삶을 회고록으로 펴내며 소중한 인연을 맺었던 분들과 만나는 전시회를 열었다. 아버지가 다른 가족이나 친척과 만나는 일은 가끔 있었지만, 온전히 아버지가 주인공으로서 당신의 삶을 돌아보고 보여줄 기회는 없었다. 소장하고 있던 서화, 즐기던 바이올린, 진료하던 청진기와 수술 가위, 논문과 저서를 사진과 같이 전시하였다.

평생 어린이를 진료하신 아버지는 예전처럼 하얀 가운을 입고 자식들과 스승의 날 찾아온 의사 제자들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며 진료를 하셨다. 예전처럼 손님을 맞이하고 손수 전시된 삶의 이력을 가리키며 설명도 하시고, 다과를 권하며 환하게 웃으셨다. 17년째 알츠하이머를 앓으며 서서히 기억이 사라져 가고 있는 아버지는 일곱 딸의 이름마저 잊어버렸지만, 전시회 기간 동안 누구보다 눈을 빛내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연신 농담을 하셔서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손주들은 아픈 할아버지의 모습만 보다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에 감탄하면서 ‘인생은 할아버지처럼!’이라고 소리 높여 건배를 했다. 무엇보다 40년간 만나온 제자들이 왔다. 돌아갈 때 아버지는 문밖까지 나가 배웅하시더니 계속 큰길을 따라가며 같이 가겠다고 하셔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더 늦기 전에 소중한 분들을 만나면서 아버지는 기력이 좋아지시고 어휘가 풍부해지며 자신감이 더 생겨나신 것 같다. 사회복지학에서 말하는 강점관점의 접근처럼 현재의 문제 해결이나 치료보다, 노인의 삶을 지지하고 평생을 살아온 유능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꿈꾼다. 최선을 다한 당신의 전성기를 떠올리며, 그때의 열정과 청춘의 기백을 회복하도록 마음의 시계를 돌려보자.

6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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