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교화 발자취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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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교화 발자취를 따라
  • 민수연 예비교무(영산선학대학교)
  • 승인 2022.08.31 08:07
  • 호수 12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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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적지순례 감상문 1

소태산 대종사님은 원기9년을 시작으로 원기28년 4월까지 백여 차례 서울에 다녀가셨다. 그 과정에서 새 회상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제자를 만나고 여러 법과 제도를 먼저 시행하기도 했다. 이번 영산선학대학교 여학생 여름정기훈련은 대종사님의 첫 상경지를 비롯해 경성교화 발자취를 따라 곳곳을 누빌 수 있었다.

대종사께서 이동진화 선진에게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할 일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법의 스승을 만나 성불하는 일이고, 둘은 대도를 성취한 후에 창생을 건지는 일이다”는 말씀을 내리자 그 자리에서 바로 큰절을 했다는 일화를 들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분이 그 말씀에 감화를 받아 귀의한 것은 구도에 대한 열망과 대종사님과의 인연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며 다시 상경하신 대종사님은 창신동 이동진화 수양채에서 이공주, 민자연화, 이성각, 김영신 선진 등을 만나 크게 기쁜 나머지 익산에서 잔치를 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나 기쁘셨길래 그 어려운 사정에 잔치까지 열었을까. 선진들이 이룬 업적을 생각하면, 그 기틀을 알아보신 것이라고 짐작해보았다.

둘째 날, 대종사께서 서울에 도착해 주무셨던 태평여관 터를 시작으로 남대문, 남산, 시청, 광화문, 경복궁, 조계사, 종로교당, 종묘, 수영사 터까지 걸었다.

현재 서울의 모습이 너무나 익숙한 나로서는 사대문이 성곽으로 둘러 쌓여있고, 도로는 ‘태평로’와 철길뿐인 옛 서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경성역’을 통해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되었고, 전에 없던 물질의 세력에 마음을 빼앗겨 전차를 타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는 현실을 바라본 성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물질문명의 유입을 보며 미래를 내다보셨을 심경 역시 상상하기 어려웠다.

사실 순례길 대부분이 익숙한 곳이었다. 북촌, 익선동, 광화문 등 어린 시절부터 다닌 곳이자 출가의 뜻을 세웠던 장소이기도 하다. 교단사적으로 중요한 곳을 수없이 오갔지만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대종사님과 선진들의 구도 열정과 교화 의지가 깃들어 있는 곳에 있었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다.

적지 않은 걸음에 지치기도 했지만, 해설사 교도님들이 한 장소 한 장소에 담긴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는 모습을 보며 그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를 아는 것과 그걸 전하는 일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그리고 단지 예비교무라는 이유로 총동문회장님, 원문화해설단, 하이원빌리지, 소태산기념관, 한강교당의 환대를 받았다.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를 생각하면 새 학기에 정진·적공하는 것으로 보은을 다짐한다. 3일 동안 대종사님의 발길을 따라 보람찬 성적지 순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감사하다.

9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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