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길 법문] 일심과 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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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 법문] 일심과 법박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2.12.07 09:04
  • 호수 12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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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 법문 26
라도현<br>화정교당 교도<br>
라도현<br>화정교당 교도<br>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공부하는 사람이 밖으로는 능히 모든 인연에 대한 착심을 끊고 안으로는 또한 일심의 집착까지도 놓아야 할 것이니 일심에 집착하는 것을 법박(法縛)이라고 하나니라. 사람이 만일 법박에 걸리고 보면 눈 한 번 궁글리고 몸 한 번 동작하는 사이에도 법에 항상 구애되어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하나니, 어찌 큰 해탈(解脫)의 문에 들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이 성품을 기르되 모름지기 자연스럽게 기르고 활발하게 운전하여 다만 육근이 일 없을 때에는 그 잡념만 제거하고 일 있을 때에는 그 불의만 제거할 따름이라, 어찌 일심 가운데 다시 일심에 집착하리요. (중략) 일심에 집착하는 폐단도 또한 이에 다름이 없나니라.<대종경> 수행품 53

위 법문에 나오는 일심(一心)은 풀어서 ‘한 마음’이라고 하지만, 물론 숫자로 하나인 한 마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법에서 일심이라는 것은 우리의 본래마음을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상(無相) 무주(無住) 무착(無着) 무위(無爲)의 마음입니다. 금강경에서 응무소주이생기심, 즉 아무데도 주한 바 없는 마음을 내라고 하였는데, 그 마음이 바로 일심입니다.

그리고 법박(法縛)이라는 것은 참다운 일심의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일심이라는 상(相)이 있어서, 이 상에 붙들려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쓰는 이 마음의 본래모습은 사실 마음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실체(實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경계[六境]에 끌려 있을 때, 그 끌려 있는 무언가를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깨어있는 상태에서, 경계에 전혀 주착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을 무어라고 하는가? 그것이 곧 일심입니다.

따라서 공부인이 본래마음을 깨쳐서 이 일심을 바르게 알고 있다면, 이 일심에 집착하면서 집착된 그 마음을 일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안팎으로 착(着) 없는 그 마음이 일심이니, 누군가 일심에 집착하고 있다면 실상 그는 일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시골 사람이 지금 서울에 와 있다면 그는 마음속에 서울의 모습을 그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머릿속에 서울을 그리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서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육근이 일 없을 때에는 그 잡념만 제거하고 일 있을 때에는 그 불의만 제거할 따름이라」는 말씀은, 단지 모르는 이를 위해서 둘로 나누어 표현해주신 것이니, 오해가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즉, 수도인에게 일심이라고 하는 것은 동정(動靜)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써, 육근이 일 있는 때에도 일심으로 처사(處事)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주착이나 상(相)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정의(正義)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2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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