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길 법문] 부채를 들어 보이시다
상태바
[지름길 법문] 부채를 들어 보이시다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2.11.23 09:14
  • 호수 128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름길 법문 25

대종사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도를 알고자 하는 것은 용처(用處)에 당하여 쓰고자 함이니, 만일 용처에 당하여 쓰지 못한다면 도리어 알지 못함과 같을지라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하시고, 가지셨던 부채를 들어 보이시며 이 부채를 가졌으나 더위를 당하여 쓸 줄을 모른다면 부채 있는 효력이 무엇이리요.하시니라<대종경> 수행품 52

사람들이 위 법문을 오해하는 경우가 퍽 많습니다. 위 법문에 기대어, 재래불교는 깨달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는데 원불교는 그러한 종교가 아니라, 앎(깨침)보다는 실행(작업취사)을 중시하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견성하는 것을 최고로 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논리적 모순이 있습니다. 비유하면, ‘사람은 온전한 마음을 갖추는 것보다 몸을 잘 운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신이 온전하다 해도 육신을 잘 못 쓴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는 주장과 흡사합니다.

“견성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앞으로는 십여 세만 넘으면 대개 초견성은 할 것이요, 성불을 위하여 큰 공력을 들이게 될 것이다”고 하신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이, 뜻밖에도 위와 같은 논리로 발전하여, 견성을 안 해도 올바른 솔성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회자되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교단에 구도인을 찾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견성·양성·솔성을 교리로 하는 우리 원불교에 구도해서 견성을 했다는 이도, 견성을 인가해주는 스승도 없습니다. 일원을 종지로 하는 종교에서 일원상의 진리를 깨친 교도를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리적 종교에서 진리에 눈뜬 사람이 없으면, 법맥도 법위도 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개교 백년이 갓 지났는데 벌써 정법(正法), 상법(像法)도 지난 듯 암울한 시대입니다.

위의 법문은 본질과 매우 다르게 해석이 되어 왔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도를 알아도 용처에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 말씀하신 것은 실로 방편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도를 알았다’는 것은 자기의 본성을 깨쳤다는 말입니다. 우리 자성은 스스로 공원정(空圓正)이며 정혜계(定慧戒)가 한 몸이어서, 공부인이 도를 깨쳤다는 것은 이 자성삼학을 동시에 쓸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를 안다면서도 이 자성을 용처에 쓰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실은 도를 알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성은 공·원·정 가운데 단 하나, 정·혜·계 중에 단 하나만 알아도(깨쳐도) 나머지 둘은 이미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도를 알고도 용처에 쓰지 못한다’는 것은 방편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위 법문을 예로 들면서, ‘도를 깨쳤다고 해도 쓰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그것은 허울만 좋은 도인이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잘못된 것입니다. 자성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공과 원과 정이 하나임을 모르고서 하는 말입니다.

도(道) 즉, 진리는 우리의 자성으로서, 쓰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만약 쓸 줄을 모른다면 그것은 성품을 깨친 사람이 아닙니다. 소태산 대종사의 위 법문은, 아마도 스스로 도를 깨쳤다면서도 도무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가짜 도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11월 25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