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에서 온 편지] 소멸消滅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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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에서 온 편지] 소멸消滅로 가는 길
  • 유성신 교무
  • 승인 2022.11.16 11:19
  • 호수 12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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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신<br>서울교구 오덕훈련원 원장<br>
유성신<br>서울교구 오덕훈련원 원장<br>

지난 겨울 설화를 뚫고 역동적인 생명의 움을 돋는 눈물겨운 봄을 맞이했다. 짙푸르름으로 온 세상이 무성했던 여름을 지나 된서리와 휘휘 부는 찬바람에 마지막 매달린 오색빛 찬란한 나뭇 잎새들이 본래 온 고향으로 회귀하며 무상함과 소멸을 노래하고 있다.

길에 수북이 내려앉은 바스락거리는 낙엽 위를 걸어 보라. 경이롭던 사계절의 변화는 우리에게 인생무상의 거울이 되고, 누구라도 인간의 생로병사를 사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축령산 자락은 이제 훌훌히 벗은 앙상한 나뭇가지들로 저 아래 계곡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바위틈으로 돌아가 흰 고양이 한마리가 싸늘한 주검으로 이별이 되었다. 짐승들은 마지막 죽어 갈 때 인적이 없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 갈 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어간다고는 하나 그 죽음의 길은 혼자 떠나가는 고독의 길 위에서 무엇으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유한한 세월 속에 언젠가는 이 세상과의 이별이 된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시기에는 너와 내가 희망과 희열에 넘치는 오케스트라의 주인공이었다.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어버린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은 적막강산이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죽음과도 같은 그 무엇도 움켜쥘 수 없는 이 계절 앞에 내 착심과 자존의 무게를 점검해 본다.

죽음은 몸과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의 연속성이 정지된 상태를 말한다. 더이상 존재할 수 없는 내가 사라지는 소멸이 이루어질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생을 여는 희망의 길이 펼쳐진다.

남방 불교에서는 죽음 직전에 일생에 자신이 지은 선업의 공덕을 많이 생각하라고 한다. 전생과 금생을 연결하는 재생연결식에서 이생의 최후 일념이 다음 생을 여는 첫 단추가 되기 때문이다. 죽어갈 때 억울함 원망함 섭섭함으로는 해탈 천도의 길에서 더욱 멀어지기에 착 없이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영혼이 새 몸을 받기 전 중음기에는 온전하게 영혼이 비어 있어야 한다. 가을 추수를 마친 빈 논밭은 휴식을 취하고 있고,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성장이 멈추어 있다. 혹한 속의 긴 겨울은 홀로이 침묵으로 빚어내는 다음 여정을 위한 고귀한 충전의 시간이다.

죽지 않고 사는 길은 없으며 죽을 때 다 내려놓고 두려움 없이 제대로 쉬어야 영생할 수 있다. 현생에서도 달리기만 하고 쉬지 않는 자는 먼 길을 갈 수 없다. 저세상으로 떠나가는 자는 이 세상과의 영원한 결별이기에 내 보따리를 챙기는 일이 가장 급선무가 된다. 흐름의 길 위에서 어깨에 힘을 빼고, 바람에 나부끼는 고무풍선처럼 온통 내맡기라.

갈애와 욕망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천길 낭떠러지 위태로운 절벽에 서서 그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죽음의 강을 수없이 건너야 연록잎 새움과 꽃망울을 터트리는 활화산 같은 새봄이 온다.

삶은 순간 찰나마다 소멸로 가는 연속이며 그 가운데 나에게로 새 인연은 오고 가는 것이다.

11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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