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에서 온 편지] 서원의 빛으로 물드는 가을이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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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에서 온 편지] 서원의 빛으로 물드는 가을이기를 …
  • 유성신
  • 승인 2022.10.13 13:33
  • 호수 12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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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에서 온 편지 18
유성신<br>서울교구 오덕훈련원 원장<br>
유성신<br>서울교구 오덕훈련원 원장<br>

땅 위에서 허공에서 가을이 물든다. 들녘에 펼쳐진 은빛 억새꽃이 서서 바람결에 춤을 추고, 논 자락에는 연둣빛에서 노란 황금빛이 발하여 벼가 익어가고 있다. 눈부시게 말간 쪽빛 하늘에는 가벼운 깃털처럼 흰구름이 조화롭고도 자유롭게 펼쳐지며, 해가 기우는 석양에는 파스텔톤 선홍빛으로 물들어 간다. 이 청명하고 해맑은 기운의 흐름이 있어 나도 모르게 하루에도 몇 번이나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본다.

자연의 빛에 물들어가는 오묘한 색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안온하고 평화로우며 즐겁다. 이 안에서는 미세하게 일어나는 슬픔도 미움도 근심도 저절로 용해가 된다.

자연의 색상은 거슬림이 없어 눈이 편안하고 부드럽다. 자연의 빛에 매료되어 한때는 자연에서 얻은 염료를 채취하여 천연염색을 하면 그 빛이 신비롭고 환희롭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빛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자신의 번뇌를 끊고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불보살의 서원으로 물든 마음에 견줄 수 있으랴. 서원이 점점 익어갈수록 영생을 일관할 생명의 빛으로 타오르기 때문이다. 서원이란 인간의 가장 고귀하고 맑은 영혼의 빛이다. 서원이 있는 사람은 먼저 법으로 온전하게 그 물이 들어야 한다.

마음에 법을 물들이는 것은 마치 염색을 하는 과정과도 같다.

물을 들이는 천은 염료에 담그기 전 오염된 얼룩을 없애고 풀기를 빼서 수세를 마쳐야 원하는 고유의 색을 얻을 수 있다. 선입견이나 사견 주견은 염색하려는 천에 오염물이 제거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래서 성품 자리를 잘 보존하여 마음 바탕이 맑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섬유에 따라 적정 온도에서 염료의 용액에 담가 30~40분 골고루 색이 베이도록 주물러야 한다. 천을 염료에 담가서 주무르는 과정은 염료가 섬유 깊숙이 침투하여 또 다른 색상으로 변화하게 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경계 속에서 주의심 있게 마음을 챙겨 불선업을 멀리하고, 선업을 가까이하여 오래오래 공부를 계속하면 업과 습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염색을 한 후에는 마지막으로 물에 여러번 헹구어 천에 깊이 침투되지 않은 염료가 씻어져야 얼룩이 남지 않고 맑고도 투명한 빛이 된다. 아직 남아 있는 아만과 자만마저도 법에 담가 버리고 버리어 순도 높게 정제될 때 균일한 조화의 인격이 드러나 내 업이 바뀌고 업연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몸이 어제와 같은 공간에 살아도 오늘은 또 다른 별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 가을 무엇으로 물들어 가는가?

공부인은 서원의 빛으로 물들어 갈 때 가장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어떤 조건에서든 빨리 물든 나뭇잎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하나 둘 낙하하고 있다. 이제는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 앞에 냉철한 이성으로 옷깃을 여밀 때이다. 죽음을 수용하고 나를 버리는 여행이 시작되는 이 계절을 맞이했다. 순역 경계 속에서 서원을 챙기면 인생은 영생을 향한 아름다운 빛으로 변화해 간다. 머무르고 싶은 자연의 빛처럼 우리 모두가 서원으로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가을이기를….

10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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