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전쇠(全盛全衰), 진리의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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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전쇠(全盛全衰), 진리의 시험
  • 전종만
  • 승인 2022.11.16 11:20
  • 호수 12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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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만&nbsp;수원교당 교도<br>​​​​​​​하나병원 원장
전종만&nbsp;수원교당 교도<br>하나병원 원장

가을이다. 봄날의 화려함과 여름의 무성함을 지나 계절은 이제 쇠잔함으로 다가온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꽃눈이 휘날릴 때부터 자연은 어쩌면 이 쓸쓸함을 준비했는지 모른다. 전성전쇠(全盛全衰). 성(盛)함 뒤에는 반드시 쇠(衰)함이 따르는 이치가 있다는 것을 천지가 몰랐을리 없다. 그럼에도 시치미 뚝 떼고 그토록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눈부신 초록으로 잎사귀를 물들인 것을 보면 야속함마저 든다.

하지만 천지의 도(道)는 이를 통해 만물의 변태와 생로병사에 해탈을 얻으라는 가르침을 준다. 시인 나태주는 ‘예뻐서가 아니다, 잘나서가 아니다. 많은 것을 가져서도 아니다. 다만 너이기 때문에, 네가 너이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안쓰러운 것이고 끝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것이다’라고 <꽃>을 노래한다.

중생에게는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성함과 쇠함이 판단과 평가의 기준이 될지 모르지만 진리는 그저 존재하게 하고 무심하게 성쇠를 줄 뿐이다. 그러니 영화를 누린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뇌쇠함을 슬퍼할 것도 없다. 소설가 박범신은 소설 ‘은교’에서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전성전쇠는 천지의 순리자연한 도이며 우리의 생각, 감정, 욕구도 이러한 도를 따른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은 알코올 중독자의 갈망감은 마치 성냥불과도 같다. 처음 성냥을 켜면 거침없이 확 타오르지만 점차 스르르 꺼져가는 것처럼 욕망도 그렇다. 공황장애 환자는 죽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응급실까지 찾아가지만 그 나락과 같은 공포와 두려움은 대개 1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중생은 경계에 따라 마음이 일어날 때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분별하고 집착하고 전전긍긍하지만 이내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 마음이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믿을 때 괴로움은 시작된다. 영원하지 않은 즐거움을 영원하다고 믿으면 고통을 받고, 영원히 진짜라고 믿었던 누군가의 마음이 거짓임을 알았을 때 절망하며, 영원히 순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오염되었음을 알면 배신감에 치를 떤다.

이것은 삶의 근간을 흔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성쇠의 파고에 휘둘리지 않도록 중도를 잘 잡아야 한다. 중도는 두 극단을 떠나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길이다. <가로등 밑의 수인>이란 우화에서 어떤 소년은 가로등이 켜진 좁은 골목길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그 옆을 지나던 사람이 이유를 묻는다. ‘금화 한 개를 잃어버렸어요.’ 그는 진땀을 흘리는 소년이 안쓰러워 함께 금화를 찾으려고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물었다. ‘저 위에 골목에서 잃어버렸어요’ ‘그럼 잃어버린 곳에서 찾아야지 왜 여기에서 찾고 있니?’ 소년이 대답했다. ‘거기는 가로등이 없어서 너무 어둡거든요.’ 중도를 잃고 도를 구하는 것은 우화 속 소년처럼 전혀 엉뚱한 곳에서 도를 찾는 일인지 모른다. 대산종사께서도 중도가 천하의 큰 도라고 하시며 ‘천지에는 원형이정과 춘하추동과 성주괴공이 있고 인간에게는 흥망성쇠와 길흉화복과 빈부귀천이 있으니… 진리가 주었다 뺏었다, 뺏었다 주었다 하는 것에 속지 말고 중도 생활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가르침처럼 우리는 중도 생활로 항상 지혜의 등불을 밝히며 살아야겠다. 성품 자리는 그 불빛 속에서 환하게 드러날지도 모른다.

11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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