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교적인 건축물 안으로 들어가면 그 종교의 신자가 아님에도 옷깃을 여미게 되고, 평소 감지하지 못했던 숙연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나에겐 모악산 금산사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그랬다. 심리적으로 위안을 받고, 잠깐이나마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혼탁한 속세와 멀리 떨어진 듯한 안정된 기분에 빠져들기도 했었다.
금산사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이다. 백제 법왕 1년(599)에 창건했고,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불의 수기를 받고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건물은조선인조4년(1626)에 재건된 것이다. 신라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도량이었다. 경내에 진표율사가 만들었다는 미륵상과 13층 사리탑 등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가 많다. 혜덕왕사, 진묵대사, 소요선사, 남악선사 등의 고승들이 거쳐 간 유서깊은 사찰이다.
절 아래에는 용화동이 있다. 미륵이 와서 평등한 세상이 된 상태를 용화(龍華)라고 한다. 금산사 아래에 있는 용화동에서 증산 강일순이 미륵불로 자처하며 활동을 했고 현재도 증산교계의 여러 교파들이 이 곳에 운집되어 있다. 또 증산은 죽음이 임박하자 제자들에게 자신이 얼마 동안 금산사에 머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증산은 자신이 유불(遊佛, 떠도는 부처)이 되리라는 말도 했다.(대순전경 9장 9~10절)
미륵불은 앉아서 침묵하는 부처가 아니다. 서서 활동하는 부처이다. 따라서 유불은 미륵불(彌勒佛)을 뜻한다. 불교의 핵심을 미륵불의 출세를 기다리는 종교라고 파악한 증산은 자신이 바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염원하던 미륵불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불교를 자신의 사상체계에 흡수시키고 있다. 증산은 금산사의 미륵불처럼 솥 위에 앉아있는 부처가 아닌,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중생들을 교화하는 부처가 되고자 했다. 증산은 이 염원을 천지공사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토착적 근대가 발생하던 시대에 태어난 증산교의 이러한 주장은 불교인들의 신앙을 끌어안아 보려는 몸짓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지점에서 장엄에 치중한 종교, 지나친 형식 위주의 종교로 인하여 현실과는 괴리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석가나 예수의 첫 출발은 민중의 마음을 끌어당길 정도로 소박했었다. 그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 교리조직의 가능성으로 발전해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증산은 교리 조직의 가능성을 남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종교의 모습이라고는 하나 그 종통을 잇는 사람들은 신비주의와 신앙 예배의 형식으로만 증산을 받아들였다. 바로 그런 점에서 증산이 본래 의도했던 큰 뜻은 대중화되지 못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1919년(원기4년) 법인기도를 마친 소태산 박중빈은 팔산 김광선과 함께 휴양 겸 교법 제정을 위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금산사 송대(松臺)에 얼마간 머문 일이 있었다. 이때 송대 벽면에 처음으로 일원상을 그려놓았다고 한다. 소태산은 이때 이미 자신이 깨친 진리를 일원상으로 표현하고 이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 교법을 제정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
증산의 큰 뜻은 결국 대중화 되지 못했다. 어려운 말로 쓰인 경전과 신비주의로 흘러간 제자들이 대중화를 막았다고 볼 수 있다. 참된 제자가 되는 일이란 이처럼 어렵다.
# 사진 설명 : 모악산 금산사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 - 모악산 금산사는 토착 미륵신앙의 발원지로 증산이 득도한 곳이기도하다. 금산사 경내에 있는 미륵전은 3층 규모의 법당으로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전에는 거대한 미륵이 서 있고 불단 왼쪽으로 들어가면 미륵의 발을 만질 수가 있다.
발을 만지기 위해 가보면 미륵이 거대한 가마솥 위에 서 있는 것을 볼수있다. 「주역」에 의하면 '혁(革)은 옛것을 바꾸는 것이요, 정(鼎)은 새것을 완성시킨다.'라고 하였다. 미륵이 가마솥 위에 서 있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원불교의 소태산은 금산사에서 일원상을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