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빛, 온누리에
상태바
깨달음의 빛, 온누리에
  • 박세웅 교무
  • 승인 2019.04.18 22:53
  • 호수 11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 교무의 '유림산책' 38

해가 지는 저녁에 익산을 거닐다 보면 교회의 십자가와 더불어 빛나고 있는 둥그런 일원상을 보게 된다. 하나는 원불교 정토회관 위에, 다른 하나는 원불교 익산교당 위에 설치돼 있다. 빛나는 일원상을 보며 때로는 거룩하고 자랑스럽게 생각되다가도 때로는 의심 하나가 걸린다. ‘우리야 그런다지만 일반사람들은 저것을 보고 과연 몇 명이나 원불교를 찾아올까?’

4월28일은 대종사의 대각을 통해 원불교가 열린 날이다. ‘깨달음의 빛이 온 누리에’ 전해지기를 바라며 교단 내에서는 각종 이벤트가 진행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고 있다. 하지만 대종사의 깨달음의 빛이 온누리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으로 무엇을 해야만 할까 생각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행사나 구호로써 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원상을 높게, 빛나게 걸어놓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결코 교화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옹(雍)은 인(仁)하나 말재주가 없습니다”고 말하자 공자는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라고 답한다.(<논어>, 「공야장」) 옹은 공자의 제자 중궁(仲弓)을 말한다. 그는 사람됨이 중후하고 과묵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겉으로 말을 잘하는 것을 훌륭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가 덕이 뛰어남을 찬미하면서도 말재주가 부족한 것을 흠으로 여겼다. 하지만 공자는 도리어 실천없이 그저 말재주만 있는 것을 오히려 하찮게 여겼다.

공자는 “옛날에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궁행(躬行)이 미치지 못할까 부끄러워해서였다”고 말한다. (<논어>, 「이인」: 子曰 古者에 言之不出은 恥躬之不逮也니라.) 공자는 평상시에 실천의 내실보다 말과 같은 형식이 앞서는 것을 경계하고 그러한 행위를 매우 부끄러워했다. 공자의 말씀은 깨달음의 빛을 온 누리에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또한 노력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내실 없이 형식에만 치우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라는 경책으로 들린다.

전산종법사는 대종사의 경륜을 받들어 누가 봐도 ‘원불교는 이런 곳이구나!’ 알 수 있도록 <정전>을 바탕으로 한 교화체계와 훈련체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당부하며, 이것이야말로 원불교 100주년 이후 교단과제 중 가장 근원적이고 핵심적인 과제라고 역설했다. 우리는 이러한 체계 안에서 반드시 실천을 통해 자신과 교단을 가꿔나가야 한다. 개인·가정·사회·국가에 그만한 ‘실천의 공덕’이 미치지 못한다면 깨달음의 빛이 온누리에 전해져가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대산종사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 즉 근본이 서야 도가 나온다고 말씀하면서 공부를 위주로 해야 교화가 따르고(工夫爲主 敎化從) 교화를 위주로 해야 사업이 따르고(敎化爲主 事業從) 사업을 위주로 하여야 인류가 따르고(事業爲主 人類從) 인류를 위주로 해야 사생이 따를 수 있는(人類爲主 四生從) 근본이 세워진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교화는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에 있지 않다. 어쩌면 그 길은 각자가 아침은 수도정진, 낮은 보은봉공, 밤은 참회반성의 시간을 갖고 하루하루 수도인의 일과를 지키며 그 속에서 교법의 실천을 통해 득력해 가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두 번으로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공자도 그랬듯이 대종사도 그랬듯이 될 때까지, 할 때까지 해보는 것이다. 그 가운데 깨달음의 빛이 온누리에 전해지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것이다.

“영원한 장래를 놓고 근본되는 일에 힘쓰라.”(정산종사)

[04월19일자]

박성호 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HK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