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체르노빌 : 류드밀라와 바실리
상태바
미드, 체르노빌 : 류드밀라와 바실리
  • 이태은 교도
  • 승인 2019.10.31 13:56
  • 호수 11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연감수성up

새벽녘 주방에 물 마시러 나온 류드밀라는 번쩍하는 섬광에 놀란다. 마치 동이라도 튼 듯 발전소 쪽이 훤하다. 곤히 잠자던 남편 바실리는 언제 깼는지 급히 집을 나간다. “발전소에 화재가 났나봐. 긴급출동이야. 당신은 조금 더 자.”

발전소 화재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관 바실리는 호스를 잡고 물을 뿌린다. 방호복을 입은 소방관은 한명도 없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까만 돌들을 바실리와 동료들은 발로 차거나 손으로 던지며 불길 잡기에 안간힘을 쓴다. 그들이 손과 발로 접촉했던 까만 돌들은 핵분열을 조절하는 감속재 재료 흑연이다. 흑연이 바닥에 나뒹굴었다는 것은 핵발전소 핵심구조인 원자로가 폭발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방사능 물질이 누출됐다. 몇 시간 뒤 소방관들은 병원으로 실려 간다. 그들을 실어 나른 구급차 또한 방사능물질로 바뀌고 접근이 금지된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류드밀라는 병원으로 달려간다. 남편을 찾아 헤매던 류드밀라는 모스크바병원에 입원한 남편과 동료들을 찾아내고 피부가 물러터지고 피고름이 흐르는 남편을 옆에서 간호한다. “잊지 마세요.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은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도가 높은 방사성물질일 뿐이에요”라는 의료진들의 만류에도 류드밀라는 병동에 몰래 숨어들어 14일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바실리 곁을 지킨다. 당시 류드밀라는 임신 6개월이었다.

14일 동안 같이 출동했던 소방관들은 다 죽었다. 바실리와 동료들의 시체는 비닐로 싸서 나무관에 넣은 뒤 한 번 더 자루로 싸고 아연으로 된 관에 넣었다. 그리고 콘크리트로 묻었다. 이들은 가족에게 인도되지 못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방사성물질로 분류됐다.

2개월 후 류드밀라는 딸을 출산한다. 손과 발, 얼굴, 몸뚱아리 모두 정상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4시간 만에 딸이 죽었다. 사인은 간경화와 선천성심장병이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방사성물질로 처리됐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아가 류드밀라 몸속에 들어온 방사능물질을 빨아들여 엄마를 살리고 아이가 죽었다.

왕좌의게임, 지정생존자 등 1위 자리를 지키는 미국드라마 제작사인 HBO가 만든 드라마 체르노빌에 나오는 실화의 일부이다. 1시간짜리 5부작인 드라마 체르노빌의 최대 단점은 ‘실화’라는 점이다. 실제에 가까운 세트장과 철저한 고증에 기반한 내용 전개, 배우들의 명연기가 드라마를 1위 자리에 올려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실화라는 사실이 가장 공포다. 몰입감 최고’ 등의 리뷰를 내놓고 있지만 그중 최고의 리뷰는 ‘살아서 만난 가공할 만한 지옥 체르노빌’이다.

위에 소개한 류드밀라와 바실리 이야기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체르노빌의 목소리> 첫 장에 나온다. 드라마 말미에 류드밀라의 최근 근황이 소개된다. 사고 직후 달려가 불을 끈 소방관, 방사능물질이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물속에 들어가 수문을 잠근 발전소 말단직원, 400명의 광부, 의료진, 군인들은 죽거나 암과 백혈병 등 병마에 시달린다. 33년이 지난 지금도 체르노빌은 봉쇄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일부지역에서 체르노빌을 관광상품으로 만들었다. 죽음을 팔아 상품을 만드는 자본, 무서운 세상이다. 바실리들의 완전한 해탈천도를 기원한다.

나무아미타불.

11월 1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