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가 교화다] 콘텐츠로 할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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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가 교화다] 콘텐츠로 할 수 있는 일
  • 허인성 교도
  • 승인 2020.10.20 15:45
  • 호수 119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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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가 교화다23

분별과 주착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어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분별이란 1)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하여 가름. 2) 세상 물정에 대한 바른 생각이나 판단. 3) 어떤 일에 대하여 배려하여 마련하는 것이다. 주착이란 일정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여러분도 이렇게 알고 쓰고 있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원불교대사전에는 ‘분별주착’은 나누고 구별하여 마음이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는 것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이라 한다. 사량계교하고 분별시비하여 망상에 사로잡힌 중생이 나누고 구분하는 마음으로 현상을 판단하고 그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것이다. 분별주착은 번뇌 망상에 사로잡히게 하여 일원의 진리를 깨닫고 본래 성품을 찾고 지키는 데 방해가 된다.

사회에서는 세상 물정에 대한 바른 생각이나 판단으로 되어 있는 ‘분별’이 불가에서는 모든 일에 대해서 어느 것이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를 헤아리고 비교하여 저울질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에서는 줏대를 갖춰야 하는 ‘주착’이 불가에서는 한 곳에 집착하고 고집하여 다른 것을 용납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다른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단순히 구별하고 머무르는 아름다운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심해져서 내 생각에 고정이 되어버리면 그 분별과 주착은 우리 스스로를 파도 넘치는 괴로운 바다에 빠지게 하는 길이 된다. 그래서 분별성과 주착심을 놓아야 본래 성품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글 몇 줄로 표현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나는 이 부분을 보고 우리가 콘텐츠로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게 많구나 하고 생각한다. 법문을 열어보면 세상 사는 이치가 가득 담겨있다. 사경을 하다 보면 그 지혜에 몸 둘 바를 모른다. 그 희열을 나만 알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누구보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 알리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번 글로 그것의 한 사례를 보여주고자 한다. 독자들은 글과 그림으로 풀어보는 하나의 예시라고 봐주면 고맙겠다. 우주만유의 본체는 대(大) 자리이고, 만상이 형형색색 구별되는 것은 소(小) 자리이다. 그냥 자리일 뿐 서로 다른 자리가 아니다. 그 자리는 천지가 순환하며, 만물의 상태가 변화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는 이 이치를 잘 연구하여 실제 일에 적용하여야 한다. 그것이 고해를 피하고 낙원생활을 하는 길이다. 누구나 원하는 잘 사는 길이다.

그럼 그 이치라는 것은 무엇인가. 절대 이치인 진리라는 것은 없다. 없다고? 진짜 없는 것이 아니다. 딱 정해져 있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이면 저것이고, 저것이면 그것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인과로 돌고 돌 뿐이다.

돌고 도는 것이라 지은 업은 받아야 하고, 지을 업도 언젠가는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하면 된다. 이미 지은 업은 피할 수가 없으니 감수하면 되고, 앞으로 지을 업은 짓지 않도록 노력하면 된다.

그런데 이것이 어렵다. 육근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하는 것이 쉬울 리가 있겠는가. 그럼 어떻게 하면 육근을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가. 바로 삼학(三學)이다. 자성자리를 벗어나지 아니하고(정신수양), 천만사리를 연마하여(사리연구), 분별주착에 끌리지 않는 것(작업취사)이 그 방법이다.

그걸 어디에 써먹어야 하는가? 바로 사업에 써먹으면 된다. 돈 버는 사업에 써먹어도 되고, 집안일 하는 데 써먹어도 된다.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어 낙원세상을 열고자 했던 소태산 대종사의 사업에도 적용해 보자. 콘텐츠로? 못할 것 없다.

 

10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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