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친견제자①] 화두가 된 대종사의 한마디 "이놈이 업을 많이 안고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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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 친견제자①] 화두가 된 대종사의 한마디 "이놈이 업을 많이 안고 왔네"
  • 강법진 편집장
  • 승인 2020.11.09 19:40
  • 호수 11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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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 친견제자 특별인터뷰①│영산교당 유인섭 교도
승산 유인섭 교도(83)

 

칠산 유건 선진의 손자

어릴 적 영산(영광군 백수읍 길룡리)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한 후, 한결같은 신성으로 일생을 이어온 승산 유인섭 교도(83). 그는 소태산 대종사의 구인제자, 칠산(七山·종사) 유건 선진의 손자다. 칠산 선진은 대종사의 외삼촌이지만, 소태산의 비범함에 무릎을 꿇고 제자가 돼 사제의 예우를 다했다. 구인선진 중에 체격도 크고 강직했던 그가 제자로서 보인 행동이 본보기가 돼 사제의 질서가 바로잡혔다는 일화도 있다.

영산 범현동에서 태어난 유 교도는 아버지보다 11살 손위인 소태산 대종사를 ‘큰아버지’라 불렀다. 어린 마음에 왜 큰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냐고 따지기도 했는데 당시 영산에 사는 박씨, 최씨, 유씨는 가까운 친척이라 그만큼 서슴없이 지냈다는 것을 다 커서야 알았다.

“아버지에게 들었는데 내가 세 살 때, 대종사님 무릎에 앉아 놀았다고 한다.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네다섯 살 때 대종사님을 몇 번 뵌 기억은 지금도 환하다.”


‘아, 이놈이 업을 많이 안고 왔네’

익산 총부(불법연구회)가 건설된 후에는 대종사가 총부에 주재하며 가끔 영산에 왔다. 그날은 온 동네 어르신들이 대종사에게 인사하러 가는 날이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그를 부르며 “인섭아, 큰아버지 오셨다. 인사하러 가자”며 그의 손을 잡고 대각전으로 향했다. 너무 어린 나이라 법설은 기억나지 않지만 법좌에 앉은 대종사의 눈빛은 지금 생각해도 빛이 났다. 그 빛이 법당 가득 찰 정도로 강렬해 잊히지 않는다. 대종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 왔다. 그날의 그 따듯함도 대종사의 눈빛만큼 강렬했다고.

“한 번은 다섯 살 때인가. 대종사께서 나를 보고 ‘아, 이놈이 업을 많이 안고 왔네’라고 아버지에게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서울 생활을 접고 다시 고향에 내려와 교당생활을 하면서 알게 됐다. 어쨌든지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며 살고자 한다.”


좌절된 전무출신의 꿈

사실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꿈은 전무출신이었다. 대종사가 불법연구회를 창립하자 그 옆에서 20년간 보필하며 뒤늦게 결혼한 아버지는 전무출신의 꿈을 접어야 했다.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인 그가 이루고자 열일곱 살에 익산으로 갔지만 끝내 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총부 고아원에도 못 들어가고 북일 고아원에서 양계장 일을 하며 이리남중에 합격했는데 다른 아이들은 다 보내고 나는 보내지 않았다. 그 길로 영산으로 내려와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시절인연이 안 맞았던 것인데 그때는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고향에서 미장기술을 배워 살고 있으니 요진건설(주) 최준명 회장이 불러 서울에서 40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바쁘게 살았다. 건축반장을 하며 토목과 조경을 도맡아 했던 그는 정년퇴직 후 그 재능을 영산성지 수호에 바쳤다. 그가 고향에 돌아왔다는 소식에 당시 이경옥 영산사무소장이 그를 불러 성지 보존지구 보수와 탄생가, 대각터 관리를 맡겼다.

“영산 대각전 안팎이며 바닥 등 내 손이 많이 갔다. 고향에 내려와서 4~5년간은 예초기를 짊어지고 탄생가와 대각터 잔디를 깎으며 고생도 많이 했다.” 하지만 고향에 내려와 살면서 ‘업을 많이 안고 왔다’는 대종사의 말씀이 조금씩 해소되기 시작했다. 전무출신의 꿈을 포기하고 서울에서 살았던 40여 년, 다시 고향에 내려와 성지 곳곳(대각전 보수, 영모전 돌담 쌓기, 법무실 처마 수리, 식당 보수 등)을 가꾸면서 고된 줄도 모르고 살았던 27년의 무아봉공 생활은 출가와 다를 게 없었다.


다음 생을 위한 기도 씨앗

지금은 대종사가 자란 구호동 집터 옆에 집을 짓고 살면서 27년간 일요법회는 두 번밖에 빠진 적이 없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병원 일정 때문이었다고. 그리고 매일 조석으로 그가 다니는 곳이 있으니,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대각터다. 고된 일과를 보내면서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기도가 그에게는 다음 생을 잇는 서원의 끈이었다.

자식 농사만큼은 부모 뜻대로 되지 않다더니, 자녀를 전무출신의 길로 인도했지만 그 꿈도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이생에 못한 전무출신을 다음 생에 꼭 이루겠다는 서원의 씨앗 그 하나다. 정업은 난면이라 했으니 이생에 안고 태어난 업은 이생에 다 갚고 다음 생에는 홀가분하게 전무출신의 삶을 살고 싶다는 그.

“어느 날 대각터에서 기도하고 있으니 경상도에서 온 순례객이 다가와 ‘저 만고일월(萬古日月)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교도도 아닌 그에게 나는 ‘원불교의 진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가 무릎을 딱 치며 한 바퀴 빙 돌더니 어디서 사냐고 물었다. 여기서 산다고 하니 ‘그럼 대종사님을 아냐’ 하길래 ‘내가 뵈었다’고 했다.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만면에 웃음을 띠며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간 그를 8월 법인절에 만났다. 그로부터 2개월여가 지난 지금도 그 벅찬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대종사가 지금의 그를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이제 그 업이 다 쉬었노라’고 하지 않을까. 오늘도 그는 대각터 일원탑 앞에서 간절히 기도 올린다. ‘다음 생에는….’

8월에 만난 소태산 대종사 친견제자, 승산 유인섭 교도&덕산 탁무영 교도

11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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