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인문] 성찰적 평화인문과 종교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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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인문] 성찰적 평화인문과 종교평화
  • 전철후 교무
  • 승인 2020.11.17 15:32
  • 호수 11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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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인문(完)
전철후 교무
성공회대 사회학 박사과정

평화란 무엇일까? 평화학과 평화와 관련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제일 먼저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다. 평화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종교·집단·사회·국가별로 평화를 인식하는 규정과 태도는 저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선방이나 수행을 하는 곳에서는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평화로 보기도 하며,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종교나 시민단체에서는 구조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 보고 있으며, 국가안보 차원에서도 국방을 강화하는 것 역시 평화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평화는 저마다의 차이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기중심적 평화를 극복해 가는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하다. 특히, 평화학에서는 폭력연구가 중요하다.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평화학 연구의 출발이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는 폭력과 고통을 명백히 하는 것이라 말한다. 폭력의 상태를 진단하고, 폭력의 과정을 확대 · 동일 · 감소 등으로 예측하고, 폭력 과정들의 감소와 생활 향상의 과정들에 대한 평화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때문에 평화에 대한 탐구는 폭력의 원인과 배경은 무엇이며, 폭력의 결과는 어떠한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찬수 교수(보훈교육연구원 원장)는 “평화는 평화들이다”라고 개념화한다. 평화는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있는 대문자 ‘Peace’ 가 아닌 다양한 평화들이 존재한다는 소문자 복수형의 ‘평화들(peaces)’이다. 평화는 peace1, peace2, peace3… 등등의 각각으로 존재하면서, peace1과 peace2가 만나 더 상위의 가치인 ‘평화들(peaces)’이 이뤄지도록 한다. 평화와 평화가 만나 더 상위의 가치인 ‘평화들(peaces)’이 되기 위해서는 peace1과 peace2의 사이에서 자기중심적 평화를 넘어서 어떠한 형태로 만나지는지가 중요하다. 이러한 평화와 평화 사이의 만남은 예를 들어, 하버마스(Habermas)가 제시한 의사소통과 공론장이 될 수 있고, ‘공공(公共)하는 철학’에서 ‘듣고 이야기하는 대화하는 철학’이 되기도 하며, 로젠버그(Rosenberg)가 제시한 비폭력적 소통이 되기도 한다.

‘평화들(peaces)’은 소태산 대종사께서 밝힌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의 존재’로서도 인식할 수 있다. 이찬수 교수는 이러한 평화를 기반으로 다양한 평화들을 긍정하고, 평화라는 공감대 안에서 유기적 연계와 통합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평화다원주의(pluralism of peace)’라고 말한다. 즉, 평화를 설명하는 다양한 술어들에서 ‘평화들’의 세계를 보고 평화의 유기적 통합력까지 읽어 낼 줄 아는 자세를 말한다. 평화학은 자기중심적 평화를 극복하기 위한 구도자로서의 성찰적 학문이면서, 융합학문으로서 미래지향적 가치를 제시하는 학문이다.

종교평화의 핵심은 ‘평화다원주의’의 관점에서 대화적이고 관계적인 것이라는 인식, 저마다의 신념은 타자에 대한 긍정, 개성의 존중, 자유의 인정 안에서만 타당해진다는 사실을 종교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종교 근본주의의 폭력성이 자기 확장에 있다는 것을 경계하면서 세계정복적 보편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으며, 세계시민주의를 대안으로 삼는다. 세계시민주의는 사고방식과 공존 행위를 통해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이며, 종교의 다름의 인정이 종교적 세계시민주의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 벡은 종교와 종교적인 것, 즉 명사인 종교와 형용사인 종교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한다. 명사로서의 ‘종교’는 이것과 저것의 이항대립의 논리에 맞춰 종교 영역을 규정하지만, 형용사로서의 ‘종교적’은 세계 속에서 종교에 제기하는 실존적 질문에 접근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형용사의 ‘종교적’은 경계를 흐릿하게 하면서 포괄적이며 통합적인 대안을 상상하게 한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개교의 동기에서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樂園)으로 인도하고자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밝히셨다. 원불교는 형용사적 표현의 ‘진리적 종교’로서 종교 안에서 종교를 넘어서며, 종교적 세계 시민주의를 지향하고자 했다.
 

11월 20일자

★교법의 대사회화를 위해 소중한 글을 연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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