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친견제자③] “인과, 그것이 내 것인 줄을 알면 마음이 편해”
상태바
[대종사 친견제자③] “인과, 그것이 내 것인 줄을 알면 마음이 편해”
  • 강법진 편집장
  • 승인 2020.11.25 19:31
  • 호수 119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산교당 덕산 탁무영 교도
소태산 대종사 친견제자인 유인섭 교도(좌)와 탁무영(우) 교도.
고향인 영산성지 대각지에서 기도 올리고 함께 걸어나오고 있다. 원기105년 8월 21일 법인절 기념식 후.

》 지난 호에 이어


인과를 깨닫게 한 아내

“지금 생각하면 우리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니다. 대종사님이 계실 때에 교도들은 무엇을 하든 대종사님이 뒤에서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신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세 살 때 기억이지만 어머니가 콩 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유무념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영산선원을 나와 목공소에서 일을 배웠다. 가마를 만들어 하루 쌀 닷대씩 받았다. 돈을 벌어 17살이 되어서야 법성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학교 시설부장을 맡아 월급을 받으며 졸업까지 무난히 마쳤다. 교장선생은 그의 능력을 살려 조선대학교 공과대 추천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이미 결혼해 가장이 돼 있었다. 더구나 이복형제와 일찍 떠난 형의 자녀, 동생, 조카까지 스무 명 가까운 식구들이 그에게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

대학을 포기한 대신 반듯한 직장생활을 하고 싶었으나, 그를 군대에 보내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과오로 실력과는 상관없이 경찰대 지원도, 언론사 지원도 모두 군 미필자로 길이 막혔다. 번번이 앞길이 막힌 그는 결국 정미소를 차렸다.

“나 때문에 안사람이 마음고생이 많았어. 명절이면 수레에 곡식을 실어다가 판 돈으로 식구들 양말을 사줬는데 돈이 부족해서 우리 아이들 양말까지는 못 사고 온 날, 나를 많이 원망했제. 그렇게 어렵게 살았어.”

그는 아내(김인화행·영산교당)에게 늘 미안해했다. 대가족을 챙기느라 정작 제 자식을 챙기지 못한 것도 있지만, 나이 마흔에 중절 수술을 한 것이 잘못돼 20년간 자궁암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암을 발견했을 때는 치료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알았어. 그러나 아내에게는 말을 못했제. 20년간 병원을 데리고 다니며 노력 많이 했는데 원망이 너무 컸어. 그래서 그 마음 돌리려고 원불교에 데리고 다녔는데 교당 문턱만 넘어가면…(하하). 그렇게 고생하다가 올해 이별했어. 내가 아내에게 전생에 빚을 많이 지고 살았지. 그래서 아프고 나서는 부처님 모시듯 했어.”

대가족을 책임져야 했기에 일찍부터 무겁고 고된 삶을 살아온 그이지만 한 번도 그 짊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인과를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게 인과구나 하고 아는 거지. 그것이 내 것인 줄을 아니까, 마음이 편해.”


평지마을 리더가 되다

원불교를 안 만났으면 결혼생활도 어려웠을 거라는 탁 교도는 사십 세 때 만난 양산 김중묵 종사의 인과법문이 인생의 큰 힘이 됐다고 한다. “김중묵 선생(당시 교무의 호칭) 밑에서 인과학을 배웠제. 그때는 교당에서 합숙하면서 공부했어. 인과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니까 삶이 좀 편해지더라고. 정미소를 운영할 때는 직원 2명까지 포함해 스무 명을 데리고 밥 먹고 살았는데 좋은 소리 못 듣고 살았어. 그것도 다 내 업이라 생각하고 살았제.”

그는 그 바쁜 와중에도 배움과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인과를 알고 나니 식구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은데 당시 여성들은 학교에 가지 못해 문맹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방 한 켠을 내어 공부방을 만들고 마을 사람들까지 30명을 모아다가 4년간 한글을 가르쳤다. 덕분에 그가 사는 천정리 평지마을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인과를 알수록 그의 선행은 더 넓어졌다. 가족을 일원가정으로 만들고, 힘닿는 곳마다 마을 구석구석 봉사하기를 즐겨했다. 목수 기술로는 마을 어르신들이 열반하면 관을 짜줬고, 마을 도로포장이나 하천공사, 초등학교 상수도 시공도 모두 그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받은 감사패와 공로패만 17개다.

 

행복했던 성지해설사 10년

“알고 보면 전부 대종사님 덕이제. 스스로 돌아봐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어. 어려서부터 대종사님 문하에 들어와서 장난으로라도 개구리 한 마리, 뱀 한 마리 잡아본 적이 없어. 왜냐면 어릴 적에 어머니가 대종사님 이야기를 해줬거든. 나 어릴 때는 여기 사람들이 갯벌에서 멍게를 잡아다가 장에 팔았어. 그걸 본 대종사께서 값을 치르고 게를 놓아주곤 했는데 그걸 또 피해서 산비탈로 도망간 사람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제. 그만큼 살생을 금했던 거여.”

혈연으로는 외숙이지만, 법연으로는 자주 가까이하지 못한 대종사. 하지만 어머니가 들려준 일화 덕분에 대종사는 항상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였어. 제주도에 여행을 갔는데 일원상이 보였어. 숙소에 짐을 놓고 다시 찾아갔는데 교당 문 앞에서 도저히 못 들어가겠는거야. 영산성지에 산다고 하면 교무님이 물어볼 텐데 대답할 게 하나도 없응게. 그게 마음에 남아 있었는데 어느 날 영산선학대학교에 문화학교가 열린다고 해서 갔어. 거기서 영산성지해설사 1기생(원기92년)으로 수료했제.”

어쩌면 평생에 하고 싶었던 공부, 하고 싶었던 일을 뒤늦게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성지해설사를 했던 10년이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내가 배우고 보니 영산성지가 얼마나 좋은 줄 몰라.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잖아. 이제는 밝은 시대가 됐는데도 사람들이 여기가 좋은 줄 몰라. 마흔 넘어서는 내 우선순위 1호가 원불교야. 얼마나 살고 갈지 모르지만 나는 원불교를 떠나 살 수가 없어.”

원불교 이야기할 때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는 올해 여든여덟이다.

11월 27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