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一心)이 동하면 정의(正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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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一心)이 동하면 정의(正義)다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0.12.15 14:44
  • 호수 1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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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 34
무시선법 14
화정교당 라도현 교도
화정교당 라도현 교도

 

「그러므로, 시끄러운 데 처해도 마음이 요란하지 아니하고 욕심 경계를 대하여도 마음이 동하지 아니하여야 이것이 참 선(禪)이요 참 정(定)이니,」 

이어서, 산중에 들어앉아 무정물과 같은 선을 닦으려 하는 잘못된 풍조에 대한 꾸지람 뒤에, 위의 구절이 나옵니다. 위 말씀은 우리 삶 속에서의 선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만약 위와 같지 않다면 그것은 선(禪)도 정(定)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시선 수행자가 어떻게 시끄러움 속에서도 마음이 요란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것은, 그 요란함을 가라앉혀서가 아니라, 요란함이 없는 자신의 마음자리(심지, 성품)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욕심 경계에서도 어떻게 동하지 않을 수 있는가? 삿된 욕망을 모조리 끊어서가 아니라, 집착에서 자유로운 자신의 마음자리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이미 갖춰진 무념 무상 무주(무착)의 자리에 바로 드는 공부가 곧 무시선법입니다. 

자, 이제 무시선법의 마지막 구절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이 무시선의 강령을 들어 말하면 아래와 같나니라.」〈육근(六根)이 무사(無事)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

이 구절은 무시선법을 한 줄로 요약한 것으로, 이것만 기억하면 누구든 무시선을 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위 내용을 보면 뭔가 좀 색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의와 불의라는 말은 이 강령을 제외하면 무시선법 어디에서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이문(不二門) 대목에서는 「시비선악과 염정미추가 제호의 일미」라고까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시선 수행자가 정의는 기르고 불의는 없애는 공부를 지속하게 되면 마침내 불이문에 드는 것인가? 

아닙니다. 무시선법은 자성의 진공묘유를 떠나지 않는 수행입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생각은 무시선의 강령을 잘못 해석한 데서 온 오해입니다. 즉 무시선법의 요지를 흔히 정신수양과목과 작업취사과목을 합쳐놓은 것으로 오해하는 수가 많은데, 무시선의 강령은 그게 아니라, 동정(動靜)에 상관없이 늘 진공(眞空)의 마음을 지녀서 천만 경계에 묘유(妙有)의 행이 나타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일심(一心)이란, 마음 가운데 망상과 분별 주착이 다 사라진 상태, 즉 진공의 마음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정산종사법어에 「망념이 끊어지면 천진(天眞)이 나타나나니, 이렇게 일심(一心)이 되면 낙원이 무궁하리라」는 법문이 있는데(원리편 59장), 여기에 나온 일심이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또한 정의와 불의도 작업취사과목에서 쓰이는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진공의 마음이 육근을 통해 묘유로 나투는 것을 정의라 한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불의가 됩니다. 이 역시 정산종사법어에 명확히 밝혀져 있습니다.

「무시선의 강령 중 일심(一心)과 정의(正義)의 관계는 어떠하오며, 잡념(雜念)과 불의(不義)의 관계는 어떠하나이까.」「일심이 동(動)하면 정의가 되고, 잡념이 동하면 불의가 되나니라.」(경의편 30장)

그러므로 이 무시선법은 전편에 걸쳐서 한결같이 ‘진공묘유의 수행’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무시선법을 닦으려는 사람은 이를 잘못 알고 그르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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