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소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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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소의 해
  • 승인 2021.01.2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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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空卽是色) 36
라도현
화정교당 교도

소리 이전의 한 구절은 / 일천(一千) 성인도 전하지 못하고 / 눈앞의 실 한 줄기는 / 긴 시간 끊임이 없네. 청정히 훌훌 벗고 말끔히 비어 있는 / 너른 들판의 흰 소여!

눈이 오똑하고 귀가 쫑긋한 / 영리한 황금빛털 사자는 잠시 그만두고 / 말해보라! 무엇이 너른 들판의 흰 소인가?

(聲前一句 千聖不傳 面前一絲 長時無間 淨裸裸赤灑灑 露地白牛 眼卓朔耳卓朔 金毛獅子 則且置 且道 作麽生是露地白牛<碧巖録>).

올해는 흰 소의 해라고 합니다. 아직 살면서 하얀 빛깔의 소를 본 적은 없지만, 마음공부를 하는 수행자라면 흰 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른바 노지백우(露地白牛)라 해서, 들판에서 노니는 흰 소는 자기 자신의 본래성품을 떠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수도인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들판에 노는 흰 소는 / 탁 트인채 종적이 없구나 / 텅 비고 고요한 지혜 / 모양도 없고 다함도 없네… (露地白牛 豁然無蹤 空寂靈知 無相無窮).

이러한 마음은 어떻게 해서 되는지를 잠깐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런 비유를 들겠습니다.

누군가 금덩이를 신문지로 쌌다가 펼치게 되면 아마 종이가 울퉁불퉁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종이 대신에 은박지로 쌌다면 어떻게 될까요? 은박지의 표면이 그보다 훨씬 심하게 구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부드러운 비단 보자기로 금덩이를 싼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금덩이를 쌌다가 다시 펼쳤을 때 비단 보자기에는 필시 아무런 자국이 남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안팎으로 수많은 대상을 대할 때, 보통사람의 마음은 종이와 같아서 언제나 선악(善惡) 미추(美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착(住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나 고정관념이 깊은 사람의 마음은 마치 은박지와 같아서, 그 흔적이 훨씬 깊게 패입니다. 그래서 자기 성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고정관념)을 어쩌지 못합니다. 이것을 해결할 길은 오직 자성을 깨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마음은, 하루종일 수많은 대상(경계)을 대할지라도 언제나 그것들에 머물지(住하지) 않으면서, 상(相) 없는 지혜를 씁니다. 그러므로 모든 분별이 밝고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진리공부를 말할 때 으레 금강경(무시선법)에 나오는 응무소주이생기심 - 마땅히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 를 인용하는 것은, 이 법어가 모든 마음공부의 금언(金言)이기 때문입니다. 이 한 구절을 모르고는 수행을 한다고 해도 아직은 방편적, 임시적 수행이며, 만약 성품을 깨쳤다고 해도 그것은 상(相)이 있는 자리를 성품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어떤 분은 비록 견성은 못했어도 자신의 성품자리를 조금은 알겠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 마음는 그렇게 지적(知的)으로 이해해서 알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불법지식이 풍부할수록, 그래서 스스로 고정관념이 많을수록 자신의 성품을 깨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 이 공부입니다.

우리의 자성을 쓰는 이 공부는 결코 희미한 털끝의 그림자 하나라도 남겨서는 안됩니다. 너른 들판의 흰 소는 아무런 모양이 없어서 온종일 마음껏 놀아도 전혀 흔적이 없습니다.

‘온전한 코끼리, 온전한 소를 보았다고 해도 눈 속의 티끌[翳]과 다름이 없네.’

(全象全牛翳不殊<碧巖録>).

1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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