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의 공즉시색] 사참과 이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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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공즉시색] 사참과 이참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1.07.04 21:20
  • 호수 12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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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문 ⑤
라도현 교도<br>화정교당<br>
라도현
화정교당 교도

「참회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참(事懺)이요 하나는 이참(理懺)이라, 사참이라 함은 성심으로 삼보(三寶)전에 죄과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을 행함을 이름이요, 이참이라 함은 원래에 죄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감을 이름이니」

참회의 방법 가운데 먼저 사참(事懺)은, 일상에서 하는 우리의 삼학(수양·연구·취사)공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심고를 통해서 법신불 사은전에 나의 잘못을 고백하며, 어느 때나 일과 이치를 잘 살펴서 바르게 취사를 해나가는 공부 그대로가 사참입니다.

참회의 두 번째 방법인 이참(理懺)은, 자성의 공원정(空圓正)을 바탕으로 행하는 참회입니다. 그래서 이참은 자기 마음의 근본을 깨치고, 이 모든 상(相)이 끊어진 자리에서 행하는 참회입니다.

이참이란 「원래에 죄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죄성이 공하다는 말은, 죄라고 하는 것은 그 본체가 공하다는 것입니다. 즉 죄라는 것은 사실 그 실체(實體)가 없다는 말입니다. 죄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라는 것을 본디 실체가 없습니다. 그 당체가 텅 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성 또한 본체가 공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참은 우리의 죄성이 공하다는 사실을 깨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렇게 될 때, 텅 빈 성품 자리에서 근원적인 참회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이참이라는 말은 자성의 공원정(空圓正)을 회복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공부인이 자성을 깨치면

참으로 불가사의한 게 있습니다.

나의 성품에 공원정의 진리가

이미 갖춰져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공원정은 글자로나 뜻으로나

세 가지가 분명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공부인이 자성을 깨치면 참으로 불가사의한 게 있습니다. 나의 성품에 공원정의 진리가 이미 갖춰져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공원정은 글자로나 뜻으로나 세 가지가 분명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점이(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많은 공부인들을 어렵게 합니다. 개념으로는 공(空)과 원(圓)과 정(正)이 분명 서로 다르지만, 성품에서는 그것들이 모두 하나입니다. 하나가 셋이며, 셋이 또한 하나입니다.

실로 모든 상(相)이 끊어졌으면서도, 동시에 밝고 두렷한 혜(慧)가 가없고, 또한 그 어디에도 기울어짐이 없어서 전혀 삿됨이 없으므로 이 공원정의 자성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어서, 체험 아니고서는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죄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친 뒤에, 안으로 자성에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번뇌 망상을 쉬는 것을 일러서 닦음이 없이 닦는[無修而修], 깨친 뒤의 수행[悟後修行]이라고 합니다. 견성한 수행자는 이로써 무상(無相) 무주(無住) 무위(無爲)의 행을 나툴 수가 있습니다.

이참(理懺)은 이렇게 모든 상이 끊어진, 우리 자성의 공원정을 바탕으로 하는 참회입니다.

 

7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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