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즉시색 46] ‘백천 겁에 쌓인 죄업도 곧 청정해진다’ - 참회문 ⑥
상태바
[공즉시색 46] ‘백천 겁에 쌓인 죄업도 곧 청정해진다’ - 참회문 ⑥
  • 라도현 교도
  • 승인 2021.07.29 16:40
  • 호수 12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우의 공즉시색
라도현 교도<br>화정교당<br>
라도현
화정교당 교도

「사람이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고자 할진대 마땅히 이를 쌍수하여, 밖으로 모든 선업을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안으로 자신의 탐·진·치를 제거할지니라. 이같이 한즉, 저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냉수도 많이 붓고 밑에서 타는 불도 꺼버림과 같아서 아무리 백천 겁에 쌓이고 쌓인 죄업일지라도 곧 청정해 지나니라.」

스스로 지은 죄를 모두 참회하고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려는 사람은, 사참과 이참을 겸하여 안팎을 아울러 닦아나가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침내 「백천 겁(劫)에 쌓이고 쌓인 죄업일지라도 곧 청정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표현입니다. 일 겁이 얼마나 긴 세월입니까! 그런데 백천 겁에 쌓인 죄업이 모두 깨끗이 씻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진정한 참회의 공덕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 구절은, 금강경에서 일체 상(相)에 머물지 않고 행하는 보시[無住相布施]는 동서남북 상하 허공으로도 가히 헤아릴 수 없다고 한 그 무량한 공덕과 흡사합니다. 죄의 본체가 공함을 깨달아, 일체의 상이 끊어진 텅 빈 자성을 떠나지 않으면, 한없는 세월 동안에 무수한 죄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금세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무자성(無自性)으로서, 그 근본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뉘우침에 관해 기독교와 불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나의 죄를 모두 사해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조금 전 우리가 배운 영원한 참회의 공덕 즉 ‘완전한 사참과 이참’의 공덕을 말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교리면에서 불교처럼 회개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의미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스스로 지은 죄를 진실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는 사실로 볼 때, 진정한 회개의 공덕은 궁극적으로 우리와 같지만, 우리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자못 간결하고 신비적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앞서 나왔던 것처럼,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쳤더라도 또다시 후과(後過)를 범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 무명에서 비롯된 삼독심, 즉 탐진치의 작동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원정(空圓正)의 자성을 깨쳐서 일체의 상(相)이 끊어진 그 자리에 계속 머물지 못한다면, 비록 천만번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지은 죄업은 결코 소멸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상 두 분 성자의 가르침이 근본적으로는 다를 수가 없겠지만, 이처럼 서로 차이가 벌어지게 된 것은 아마도 가르침에 스며있는 방편(方便) 때문일 것입니다.

성인들께서 가리키신 본지(本旨)를 올바로 깨닫는다는 것은, 그 가르침을 철저히 믿고 따르는 것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경전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하나는 ‘요의경(了義經)’이라 해서 ‘진설법문(眞說法門)’을 말하고, 또 하나는 ‘불요의경(不了義經)’이라고 해서 ‘방편법문(方便法門)’을 가리킵니다.

7월 30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