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봉지 공주』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상태바
『종이 봉지 공주』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 김화이 객원기자
  • 승인 2021.08.17 13:35
  • 호수 12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림책 산책 19

 

『종이 봉지 공주』
로버트 문치 글/마이클 마첸코
그림/김태희 옮김/비룡소/1998년

 

엘리자베스 공주는 로널드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공주와는 달리 왕자의 표정이 마뜩잖네요. 뭔가 못마땅한 얼굴로 공주를 등진 채 선 왕자,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공주. 만약 누가 더 사랑하는지 무게를 잰다면 보나마나 공주 승!

어느 날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성을 부수고, 뜨거운 불길을 내뿜어 공주의 옷을 불사른 뒤 왕자를 잡아가 버립니다. 재투성이에 알몸이 된 공주는 그 와중에도 왕자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해요. 그저 길에서 주운 종이 봉지 한 장을 걸친 채로요. 용을 뒤쫓아 가는 공주가 낯설어 보이는 건 저뿐일까요. ‘기다리면 왕자가 구하러 오지 않을까?’라는 제 예상이 보기 좋게 깨집니다.

재치와 용기를 겸비한 공주는 용을 상대로 힘 한번 쓰지 않고 기지를 발휘해 마침내 왕자를 구해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왕자는 자신을 구하러 온 공주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네 꼴이 엉망이구나…. 진짜 공주처럼 챙겨 입고 다시 와!”라고 면박을 줍니다. 공주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왕자에게 대답하죠.

“넌 진짜 왕자 같아. 하지만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왕자의 실체를 알게 된 공주는 왕자와 결혼하지 않습니다. 아니, 왕자를 버립니다.

고작 이 형편없는 빈껍데기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나 하는 후회가 들 법도 하지만 공주는 쓰고 있던 왕관도 벗어 던지고 미련 없이 새로운 길을 떠납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한 그녀의 뒷모습이 그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이네요.

이제 공주는 혼자가 됐습니다. 혼사는 깨졌지만 대신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으니 당당하고 굳건한 어른으로 자라나지 않을까요.

8월 20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