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조요경] 법이 스며들다
상태바
[불조요경] 법이 스며들다
  • 박세웅 교무
  • 승인 2021.11.29 02:51
  • 호수 12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볼조요경 다시읽기 11
박세웅(성호) HK교수-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박세웅(성호) HK교수
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우리 대종사님, 또 부황한 말씀을 하시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소태산 대종사의 몇몇 제자들은 대종사가 다가올 미래 세상에 대한 말씀을 하면 현실감 없는 말씀이라 여겼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가난하고 무지했던 시골에서 살아온 제자들의 생각에 대종사가 말씀하는 새 시대의 새로운 세상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종사도 이를 짐작하였는지 “그대들은 오늘에 있어서 아직 증명하지 못할 나의 말일지라도 허무하다 생각하지 말고, 모든 지도에 의하여 차차 지내가면 멀지 않은 장래에 가히 그 실지를 보게 되리라” 하고 당부한다(〈대종경〉서품 15장)

『금강경』 11장은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으로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항하가 있고 다시 그 항하들의 모래 수만큼의 세계에 칠보(七寶)로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 가운데 사구게(四句偈) 등을 받아 가져서 다른 사람을 위해 전해주면 그 복덕이 더 수승하다고 말한다. 앞서 『금강경』 5장의 사구게에서는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상이 상 아닌 것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은 皆是虛妄이라 若見諸相非相이면 則見如來)라고 했다.

이에 대해 좌산상사는 “형상 있는 것은 가변적인 것으로 결국 형상으로는 영원히 믿을 수 없는 것이라, 이러한 것을 다 놓아버리고 허망한 것임을 봐버려야 가장 변하지 않는 실상 자리를 볼 것이요, 여래를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한다. 앞서 『금강경』 8장에서도 복덕과 복덕성의 차이를 설명하였듯이 여래의 실상이라는 것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무용한 자리가 아니라 그 가운데 무궁한 묘리와 무궁한 보물과 무궁한 조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고 복덕이 나올 수 있는 근원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는 자리이다. 때문에 이 실상 자리를 알게 하는 것이 항하들의 모래 수와 같은 칠보의 복덕보다 수승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는 당시 제자들이 자신의 이와 같은 말을 믿지 않고 부황하다고 여길 것으로 생각했는지 “수보리야 내가 지금 실다운 말[實言]을 너에게 하려고 한다”라고 당부한다. 신(信)은 곧 법을 담는 그릇이다. 스승이 아무리 법문을 억수같이 내려준다 할지라도 그것을 받드는 제자가 신이 서 있지 않으면 그것을 자신 안에 담을 길이 없다. 그렇다면 신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느 날 밤 운전을 하다 아이가 물건을 찾기 위해 차 안의 불을 켜자 순간적으로 밖이 보이질 않아 크게 사고가 날 뻔한 적이 있다. 왜 순간 보이지 않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이치는 간단했다. 안의 등불을 꺼버려야 비로소 밖의 빛이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인의 법을 받들어 자신 안에 스며들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 안의 반딧불과 호롱불을 꺼야만 한다.

정산종사는 “어두운 밤에는 반딧불도 빛나고 전등이 없는 곳에서는 호롱불도 밝은 듯하나 태양이 솟으면 모든 빛이 따를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한다. 자세히 아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모르지도 않아서 항상 의심을 풀지 못하고 법과 스승을 저울질하는 중근의 근기는 가장 가르치기 힘들고 변덕이 많은 근기라 했다. 스스로 돌아본다. 대종사는 ‘이러한 사람은 법을 가벼이 알고 스승을 업신여기기 쉬우며 모든 일에 철저한 발원과 성의가 없으므로 공부나 사업에 성공을 보기도 대단히 어렵다(신성품 2장)’라고 말씀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딧불과 호롱불과 같은 얕은 지혜를 가지고 부황하다 계교하는 마음과 호의불신(狐疑不信)하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오직 스승의 법이 내 안으로 온통 스며들게 해야겠다.

“자신을 끄고 여래를 켜자.”

12월 3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