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에서 온 편지] 하나의 기운으로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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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에서 온 편지] 하나의 기운으로 소통한다
  • 유성신
  • 승인 2022.03.23 16:50
  • 호수 1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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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에서 온 편지 12
유성신<br>서울교구 오덕훈련원 원장<br>
유성신
서울교구 오덕훈련원 원장

은혜로운 모태를 여의고 바람결에 홀로 멀리 날아간 바람꽃의 씨앗은 떨어진 그 자리에서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난다. 그곳에 머무는 한 생명체는 존재의 사명을 다하다가 씨앗을 맺어 다음 생의 여행을 준비하고 또 떠나간다.

마음 모아 조용히 눈을 감으면, 지나온 삶에서 만났던 법연 혈연 지연들 그리고 이미 피안을 건너가신 분들의 성안과 음성도 들린다. 소리 없는 절규로 일구월심 기도로 훈증 하시고 때로는 불호령으로 훈계하신 스승님들과 어려운 상황에 손 내밀어 디딤돌이 되어준 도반들도 만나게 된다. 나의 존재 근원은 한때 힘들었던 역경으로 맺어진 인연들까지도 모두가 영생의 서원을 향한 은혜로운 평등성지의 한줄기 빛이다.

십년 만에 수화기를 들어도 어제 만난 것처럼 반가운 사람이 있다. 그 무엇에도 걸림 없이 비어 있으면 거기에는 장벽이 사라지고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이어진다. 그 자리에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허공에 인연 꽃이 핀다. 자연과의 소통도 사람과의 소통도 먼저 나 자신이 안으로 고요하고 청정한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밤낮으로 연이틀 내린 빗줄기가 긴 겨울의 여운을 송두리째 쓸고 갔다. 봇물 터지는 계곡물 소리로 제법 산자락이 쩌렁쩌렁 울린다. 기지개를 켜고 닫힌 창문을 활짝 열어 밖의 소식을 자유롭게 보고 듣고 느낀다.

어디선가 연기가 피어올라 이리저리 부는 바람 따라 소나무 향 내음이 그윽하다. 잠시 한달음에 뒷동산을 오르면 저 발아래 첩첩이 겹산으로 펼쳐진 허공이 장관을 이룬다. 붓을 들어 터치하면 안개가 산자락을 너울 휘감는 여백의 운치를 생동감 있게 한 폭의 수묵화로 금세라도 담을 것 같다.

텅 빈 허공을 머리에 이고, 부드러운 흙길을 밟고, 이른 새벽에 폐부를 가르는 청량한 공기와 한낮에 부는 부드러운 바람과 햇살을 일상에서 마주한다. 주변에 지천으로 산재한 이 모두는 나를 감싸는 주인 없는 보석과도 같다.

도심의 불빛 야경을 즐기고, 누군가를 만나서 쇼핑을 하고, 기름진 음식의 포만감보다는 그저 단순한 자연을 만나고 담박한 된장국에 김치와 나물만으로도 산중에 사는 즐거움이 있다.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대상만으로도 희열로 충만하게 한다.

조용히 귀 기울이면, 도시의 경적과 기계 소음 대신에 새벽녘에는 닭이 울고, 한밤중에는 저 멀리서 개 짖는 산울림이 있다. 봄을 재촉하는 종달새의 노래와 이름 모를 새들의 대합창으로 세상의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자연은 인간의 오염된 몸과 마음을 자정 작용하여 새로운 기운으로 충전하는 힘이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지중한 인연의 고리 속에서 연기적으로 살아간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인연 따라 잠시 잠깐의 내 집 내 소유가 있을 뿐이다.

천지는 차별이 없는 자리에서 함이 없이 무위자연으로 두루에게 베풀어 생명을 화육 시킨다. 이러한 자연에 마음을 푹 담그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텅 비어 천지와 통하여 소소영령한 기운을 알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봄이 오는 것도 사람이 오는 것도 열린 하나의 기운으로 전해 오는 것이다.

3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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