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길 법문] 동動과 정靜에 간단間斷 없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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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 법문] 동動과 정靜에 간단間斷 없는 공부
  • 라도현
  • 승인 2022.04.22 09:43
  • 호수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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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지름길 법문 14
라도현<br>화정교당 교도<br>
라도현
화정교당 교도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과거 도가(道家)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면, 정할 때 공부에만 편중하여, 일을 하자면 공부를 못 하고 공부를 하자면 일을 못 한다하여, 혹은 부모 처자를 이별하고 산중에 가서 일생을 지내며 혹은 비가 와서 마당의 곡식이 떠 내려가도 모르고 독서만 하였나니 이 어찌 원만한 공부법이라 하리요. 그러므로, 우리는 공부와 일을 둘로 보지 아니하고 공부를 잘하면 일이 잘되고 일을 잘하면 공부가 잘되어 동과 정 두 사이에 계속적으로 삼대력 얻는 법을 말하였나니 그대들은 이 동과 정에 간단이 없는 큰 공부에 힘쓸지어다.」 (<대종경> 수행품 3장)

공부인이 정(靜)할 때 공부에만 편중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간경(看經)이나 염불, 좌선 등에만 거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에만 치중한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사실상 놓아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교도로서 분명히 해야 할 공부가 아닐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일상사를 불고(不顧)한다면 이것은 ‘삶을 위한 불법’이 아니라, 불법을 위한 삶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지극히 정적(靜的)인 공부로 말하자면 초기불교(현재의 남방불교) 수행 중 하나인 ‘사마타’ 수행이 있는데, 마음을 한 대상에 집중하여 안·이·비·설·신 다섯 가지 감각이 모두 끊어지는 공부입니다. 조선시대 진묵대사가 어느 날 문틈에 손가락이 끼인 채 피가 흥건히 흐르는 것조차 모르고 정(定)에 들었다는 일화는 곧 사마타를 말합니다. 이 수행은 오로지 고요함을 닦는 공부이기는 하지만, 이 사마타를 모르고 공원정(空圓正)의 무시선법(위파사나)을 닦는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말씀하신 ‘공부와 일’이 둘 아닌 공부법은 바로 무시선법(위파사나)을 말합니다. 수행인이 때와 장소 구분 없이 ‘공부와 일’이 둘로 나뉘지 않으려면, 그의 마음이 적적성성 성성적적한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 경지는 마음이 오롯이 활짝 깨어서 일체의 육근을 사용하면서도, 실로 그 어떤 경계(대상)에도 머물지(住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텅 비고 고요하되, 또한 사물[경계]을 여실히 구별하는 자성의 혜광[무분별지]이 두렷합니다. 이것이 곧 ‘공부와 일’이 둘로 나뉘지 않는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입니다.

우리 정전에 있어서 ‘일원상의 수행’과 ‘무시선법’ 그리고 ‘상시응용 주의사항 제1조’와 ‘일상수행의 요법 1·2·3조’가 바로 이 공부로서, 이 자리를 만나지 않고서는 원불교 수행법의 진수(眞髓)를 알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대산종사께서 어느 날 수계농원에 갔을 때, 현판에 반농반선(半農半禪)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전농전선(全農全禪)’으로 바꾸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와 일’이 둘 아닌 수행으로 말하자면 ‘농선불이(農禪不二)’가 되어야 합니다. 동과 정에 간단(間斷) 없는 공부가 동정일여의 무시선법입니다.

4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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