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길 법문] ‘바느질’ 하면서 ‘약’을 달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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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 법문] ‘바느질’ 하면서 ‘약’을 달이기
  • 라도현
  • 승인 2022.06.09 21:36
  • 호수 12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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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의 지름길 법문 17
라도현<br>화정교당 교도<br>
라도현<br>화정교당 교도<br>

양도신이 여쭙기를 「~ 제가 이 즈음에 바느질을 하면서 약을 달이게 되었사온데 온 정신을 바느질 하는 데 두었삽다가 약을 태워버린 일이 있사오니, 바느질을 하면서 약을 살피기로 하오면 이 일을 하면서 저 일에 끌리는 바가 될 것이옵고, 바느질만 하고 약을 불고하오면 약을 또 버리게 될 것이오니,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공부의 옳은 길이 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때 약을 달이고 바느질을 하게 되었으면 그 두 가지 일이 그 때의 네 책임이니 성심 성의를 다하여 그 책임을 잘 지키는 것이 완전한 일심이요 참다운 공부니, 그 한 가지에만 정신이 뽑혀서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두렷한 일심이 아니라 조각의 마음이며 부주의한 일이라, 그러므로 열 가지 일을 살피나 스무 가지 일을 살피나 자기의 책임 범위에서만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방심이 아니고 온전한 마음이며, 동할 때 공부의 요긴한 방법이니라~」 (<대종경> 제3수행품 17장)

부처님과 조사의 법문은 모든 제자에게 그 가리키는 곳이 모두 같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제도(濟度)에 있어서 천만 방편을 쓰신다는 말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일을 할 때 저 일에 끌리지 아니하고, 저 일을 할 때 이 일에 끌리지 않게 하라.’

이 말은 누구에게나 전혀 생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의 일에 오롯이 집중하라, 눈앞의 일에 전념(專念)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눈앞의 일에 오롯이 집중한다는 것은 불법수행에 있어서는 또 달리 해석될 수가 있습니다. 즉 이것은 마음이 한 경계(대상)에 끌리어 주착(住着)되어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바꿔말하면,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경계에 끌려가서 그 대상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대상에 주착하지 않고 과연 일할 수 있을까요?

물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한 바 없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진리적 수행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게 하는 수행입니다. 이 주한 바 없는 마음이 ‘적적성성(성성적적)한’ 마음이며, ‘공적영지가 발하는’ 마음으로서, 이 상태에서는 어떤 한 가지 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가 동시에 가능합니다.

예를 들자면, 좌선이나 행선 중에 텅 비고 두렷한 마음은 내 몸의 동작과 느낌, 주변의 상황과 소리를 모두 동시에 인식할 수가 있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도 상대방의 말과 자신의 음성, 주위의 움직임과 상황들의 변화도 또한 생생히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고요하고 두렷한 마음이 ‘아무 데도 주한 바 없는’ 성성적적한 경지에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이 상태는 내 성품의 정(定)과 혜(慧)를 함께 쓰는 것으로, 이 자성 정혜를 함께 쓰는 것을 ‘무시선’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내 마음이 적적성성(성성적적)하면 바느질과 약 달이는 일을 동시에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분별이 정(定)을 여의지 않음’이 공원정(空圓正)의 무시선 수행이며, 정전에 있는 일원상의 수행입니다.

6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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