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길 법문] 무엇으로 취사의 ‘대중’을 삼으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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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 법문] 무엇으로 취사의 ‘대중’을 삼으리까
  • 라도현
  • 승인 2022.07.26 17:30
  • 호수 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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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 법문 20
라도현<br>화정교당 교도<br>
라도현<br>화정교당 교도<br>

문 정규(文正奎) 여쭙기를 「경계를 당할 때에 무엇으로 취사하는 대중을 삼으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세 가지 생각으로 취사하는 대중을 삼나니, 첫째는 자기의 본래 서원(誓願)을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스승이 가르치는 본의를 생각하는 것이요, 세째는 당시의 형편을 살펴서 한 편에 치우침이 없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라, 이 세 가지로 대중을 삼은즉 공부가 항상 매(昧)하지 아니하고 모든 처사가 자연 골라지나니라.」 <대종경> 수행품 33장

경계에서 무엇으로 취사의 대중(기준, 표준)을 삼아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당연히 경전에 있는 내용을 떠올립니다. <정전>의 작업취사 절(節)을 보면, 「취사라 함은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림을 이름이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위 질문에 대한 답은 단연 ‘정의와 불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위와 같이 답하셨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서원을 생각하고, 둘째는 스승의 본의를 생각하고, 셋째는 어딘가에 편착이 없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정의와 불의’라는 것이 때로 사람의 마음에 따라, 각자의 믿음과 근기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가령, 벌을 주는 검사의 정의(正義)와, 자비로써 바라보는 보살의 정의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서 보는 정의가 서로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불의는 판에 박은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취사의 기준으로는 무언가가 더 있을 것입니다.

위 법문에서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첫째, 자기의 본래 서원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본래 서원을 잊지 않고 있다면, 경계에 끌려 마음이 삿된 길로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는, 스승이 가르치는 본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제멋대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것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취사의 표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당시의 형편을 살펴서 ‘한 편에 치우침이 없는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이 공부인에게는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앞의 두 방법은 대체로 그 해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주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놓인 경계가 시비선악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거나, 또는 그것들이 서로 얽혀 있을 때는, 신심이 깊고 굳은 서원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쉽사리 취사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이것은 의지(意志)와 결단력의 문제가 아니라, 참 지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방법은 ‘생각을 떠올려서’ 답을 얻는 것이지만, 이 세 번째 방법은 도리어 생각을 쉬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밤새 끙끙대던 수학 문제가, 자고 나서 아침에 풀어보면 의외로 쉽게 풀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난마(亂麻)처럼 얽힌 문제가, 생각을 다 놓아버리고 좌선을 하다가 해답이 떠오르는 수가 있습니다.

공부인이 천만 경계에서 영원히 표준 삼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성품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부처의 지혜이며 일원상의 지혜로서, ‘한 편에 치우침이 없이’ 지공무사한, 우리 자성의 공적영지입니다. 이 공원정(空圓正)의 지혜는 마음에서 번뇌가 끊어져 성성적적 적적성성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나타납니다.

7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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