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화100년 기념 서울성적지 연구보고 여섯 번 째] 조광의 비방기사와 조선일보사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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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화100년 기념 서울성적지 연구보고 여섯 번 째] 조광의 비방기사와 조선일보사 방문
  • 한울안신문
  • 승인 2024.09.25 17:06
  • 호수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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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길튼 안산국제교당 교무

 

돈암동회관 정문(출처:<조광>6월호)'수양원'문패(대문 왼쪽), '불법 연구회 경성 지부'간판(대문 오른쪽)

원기22년(1937)에 조선일보 자매지인 월간잡지 〈조광朝光〉(1935년 10월 창간) 기자가 불법연구회 경성지부 돈암동회관에 취재차 방문한다. 당시 돈암동회관에는 총대회(5월 6일, 음 3.26) 관계로 교무들이 익산총부에 참석하여 묵산 박창기가 임시 주재 중이었다. 그런데 〈조광〉 기자는 박창기의 성실한 답변은 뒤로한 채 쓰고 싶은 의도에 따라 왜곡된 기사를 낸다. 
1937년 2월, 백백교가 많은 신도를 살육한 사건이 드러나 사회는 충격에 빠진다. 이때 〈사교 백백교 사건의 정체〉를 밝히고 5개 유사종교를 폭로한다며 〈유사종교 소굴탐방기〉의 첫째 기사로 ‘교주를 생불 삼은 불법연구회 정체’라는 제하의 악의에 찬 기사를 익명의 기자이름(又夢人)으로 발표한다. 다음은 기사 일부이다.

<조광>지 기사 제하

「기자는 단단히 맘에 간직하고 왔던 일대비수를 꺼내어 “서대원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 “그이가 불법연구회에 입회한 후 재산을 모아 탕진하고 자기 누이를 처녀로 바치고 나중에는 손목까지 끊어 바쳤다는데요?” … “그뿐만 아니고 정녀를 바치라고 하여 처녀들이 여기 많이 모여서 갖은 추행이 있다는 말이 있던데요!” … “여름이면 교주 옆에 수십 명 처녀 떼가 모여서 부채질을 하고 야단이라는 데요?” … 기자는 회당 내부를 … 보게 되었다. … 벽문을 열고 비밀실을 들여다보니 일원상이라고 하여 큰 목판에 푸른빛으로 원형을 그리고 거기다 절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한쪽에는 교주의 사진이 있는데 … “교인들이 저분을 생불(生佛)이라고 하여 밤낮 절을 한다지요?”」 (〈조광〉 6월호)

옛조선일보사 터, 코리아나호텔

소태산 대종사는 5월 25일과 26일 양일에 걸쳐 요인회를 소집하여 협의를 이어간다. 이에  “사람이 세간에 나타나서 사업을 경영하는 마당에 있어 사실 유무를 막론하고 선악의 평판이 으레 따르는 바이며, 더구나 금번 기사 내용을 보건대 근자 백백교 사건의 발생으로 인하여 … 어떠한 기자가 일시적 호기심에서 철모르는 붓장난을 한 듯하니 … 그와 같이 근거 없는 말을 듣고 그저 묵과(默過)키는 어렵다. 그러나 절대로 그들과 상대하여 투쟁을 할 것이 아니라 금일이라도 사람이 가서 본회의 취지와 실행사업을 철저히 설명하여 그 사(社)의 오해를 일소(一消)하고 그 인식을 바로 잡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다.”(〈회보〉 36호)라고 결단한다.
그리하여 5월 29일에 경성 태평로에 있는 조선일보사에 이재철(서정원장)과 유허일(공익부장)을 대표로 파견하여 방응모 사장을 비롯한 관계자를 만나 그 기사의 사실무근함을 설명하고 조치를 요구한다.
“재차 상세히 조사해 보아서 그보다 더 악한 사실이 있을 것 같으면 근본적으로 폭로하여 배격할 것이요, 만일 그러한 사실이 없다면 그것은 귀사의 책임이니 기사 정정은 물론 우리 회중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사회공중 표현기관으로서 당연한 도가 아니겠습니까?”(〈회보〉 36호)

태평로 조선일보사(출처:조선 일보사 100년사)

이와 같은 정중한 요구에 조선일보사는 호의로 받아들인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6월 1일, 조선일보사 전북 특파원과 이리지국장이 총부를 내방하여 취재하고 각 실행 사업을 파악해간다. 이어 8월 10일자 조선일보 3면에 「불교혁신 실천자 불법연구회 박중빈씨」라는 제하의 정정 기사를 내며 소태산 대종사를 ‘조선불교사의 루터’라고 소개한다. 
이처럼 소태산은 비난 언론에 대처할 때 동포은의 자리이타법(自利利他法)에 따라 처사에 합당하고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를 도모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대종경』 교단품 26장의 “세간의 칭찬과 비방에 너무 끌리지 말고 오직 살피고 또 챙기어 꾸준히 당연한 일만 행해 나가라.”는 법문과 관련 있다.
조선일보 태평로 신사옥은 1933년 8월 5일 기공식을 하여 1935년 7월 6일 낙성식(준공식 6.10)을 한 지하1층 지상4층의 건물이다. 이재철과 유허일이 방문할 당시의 조선일보 사옥은 태평로 1가 61번지에 신축한지 2년여 밖에 안 된 건물로, 지금은 이 자리에 코리아나호텔이 들어서 있다.
태평로 조선일보 신사옥 2층에 사장실 응접실 귀빈실 주필실 편집국 편집국장 응접실 등이 있었다(『조선일보사100년사』). 이재철과 유허일이 방문했을 당시에 2층 응접실로 안내받아 관계자 및 사장을 만나 합당한 조치를 요구했던 것이다. 

 

9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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