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형기가 <낙화>에서 노래한 대로 가야할 때가 언제인지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그 이유는 아마 한때 강고했던 현실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뜨거운 냄비 속의 국수처럼 풀어져 삶이 허망한 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무 미련없이 초연하게 그 자리를 뜨기 때문일 것이다.
법연 선사가 말했다. “소가 울타리를 지나가는데, 머리와 뿔, 그리고 네 다리는 전부 빠져나갔음에도 꼬리가 지나가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머리와 뿔이 울타리를 나오고 네 발마저 온전히 나왔다면 꼬리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무 문제없이 나와야 할 꼬리가 덜컥 울타리에 막혀버리고 말았다면 이 상황은 비상식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사태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고 다반사로 행해지고 있다.
소가 울타리를 건너듯 우리도 세상의 각종 장애를 지나고 온갖 장벽을 넘는다. 그래서 섭세涉世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며 난관과 위태로움의 연쇄다. 이런 지경에 직면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자기의 이익을 견지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하지만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이루는 와중에 막상 중요한 순간은 놓치고 소중한 기회는 잃기 십상이다.
소의 꼬리는 인간의 뒷모습을 상징한다. 소가 얼굴과 뿔과 네 다리는 마음대로 부릴 수 있지만 꼬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듯이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앞모습은 볼 수 있지만 뒷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바로 그 볼 수도 없고 꾸밀 수도 없는 뒷모습에 삶의 흔적과 인생의 진실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 모습은 교정할 수도 없고 분장할 수도 없으며 필요에 따라 가릴 수도 없다.
그래서 자기만 모른 채 본인의 인격의 수준을 그대로 외부로 드러내며 인품의 정도를 적나라하게 남에게 노출시킨다.
무문無門이 앞서 본 오조의 공안에 대해 비범한 식견이라는 뜻을 갖는 일척안一隻眼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이것이 치열한 대립을 조장하고 상대성의 한정된 세계를 고착시키는 불완전한 눈을 극복할 수 있는 도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눈은 편견에 물든 닫힌 세계를 뚫고 일상에 사로잡힌 경색된 세상을 뒤엎는다. 이 눈을 갖추면 소가 꼬리를 울타리로부터 뺄 수 있듯이 우리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그대로 담고 있는 뒷모습을 비로소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인간은 자기 기만에 능숙하다. 그러다가 들키면 과오를 덮고 아닌체 하지만 그런 시도는 늘 실패하며 그 자취는 뒷모습에 그대로 새겨진다. 일척안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사서삼경이나 팔만대장경만 경전인 줄 알고 일상에 나타나는 큰 경전을 알지 못하는 세태를 우려하며 사람이 참된 정신을 가지고 주변을 본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경전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이 정신의 부재가 소의 꼬리가 울타리는 넘지 못하듯이 인간이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연유이기도 하다. 온갖 경전이 우리의 앞길을 비추지만 소가 꼬리를 놓치듯이 정작 우리는 그 길 뒤에 어떤 진실을 자취로 남기는지 잘 알지 못한다. 생활에 나타나는 큰 경전을 먼저 읽으라는 대종사의 당부야말로 아름다운 뒷모습을 갖추고 사은四恩에 보답하며 삼계에 도움을 주는 일의 출발임을 간곡하게 이른 것이다.
11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