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동회관 부지(돈암리 509 및 510. 585평)는 원기18년(1933) 6월 8일 이공주의 집을 매매한 자금으로 당일 매입(『구토지대장』)하여 송도열(도성) 명의로 이전 등기한다.
또한 원기18년(1933) 7월 5일 창신동회관을 매매(『구토지대장』)한 자금 750원과 회원적립금 수백원을 합한 1,300원으로 신축공사에 착수하였다.(『구도역정기』 융타원 김영신 법사편)
돈암리 510번지(571평)는 전(田)이며, 509번지(14평)는 대(垈)이다. 아마도 기존 초옥(토담집 3채)은 대지인 509번지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이후 원기18년(1933) 윤 5월 13일(7.5)에 경성지부 옥사건축위원으로 오창건이 임명되고(〈월보〉 47호 광고), 윤 5월 16일(7.8) 상경하며 또한 27일 소태산도 상경한다.(〈회보〉제1호 인사동정)
소태산은 돈암동회관 신축공사를 위해 원기18년 윤 5월 27일(7.19)~음력 6월 20일(8.11)까지 그리고 음력 7월 12일(9.1)~음력 8월 24일(10.13)까지 2차례에 걸쳐 1달여씩 머무르며 건축 감역을 한다.(〈회보〉제1~4호 인사동정)
원기18년(1933)년 음력 3월 26일(4.20) 제5회 정기총회에서 이완철과 이동진화는 경성 교무로 임명되어 음력 4월 12일(5.6)에 부임하여 4월 16일 첫 예회를 담당한다.(〈월말통신〉제46호 인사동정 및 각지회합) 그해 7월부터 건축을 준비하여 오창건의 감독과 소태산 대종사의 지도에 따라 풍우(風雨) 염량(炎凉)을 무릅쓰고 2천원의 총공비(기지대基地代 1,200원은 제외)로 4~5개월 만인 음력 9월 16일(11.3)에 서울 최초의 신축교당 낙성식을 겸한 첫 예회를 거행한다.(〈회보〉제7호 ‘경성지부 신축 낙성에 제하여’)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18년(1933) 음력 8월 24일(10.12) 경성지부에서 익산총부로 귀관한다.(〈회보〉제4호, 인사동정) 그리고 음력 9월 29(11.16)일 상경하여 돈암동회관에 주석한다.(〈회보〉제5호, 인사동정) 이로보아 소태산 대종사는 돈암동회관 낙성식에는 임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음력 10월 6일(11.23) 예회에서 돈암동회관 신축 후 첫 설법한다.
돈암동회관(법당채)를 건축할 때의 김영신 회고담이다. “공사기간 동안 현장에는 토담집이 3채 있었는데 어머니와 나는 아래채에 살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어머니는 바느질품을 팔아가며 종사주님, 사산님(오창건), 정일지 교무 세 분께 공양을 올렸다. … 종사주께서 대문간 평상에 앉아 계셨는데 부엌에서 샘터에 가려면 그 앞을 지나야 했다.”(『구도역정기』 융타원 김영신 법사편)
기존 토담집에 드는 대문간이 있었고 그 근처에 샘터가 있었으며, 이 토담집 주위에 밭이 있었고 그곳에 회관을 지었던 것이다.
“낮에 공사를 끝내고 저녁 공양을 드시면 종사주께선 산위로 올라가 돗자리를 깔고 좌정하시곤 두 분 남자선생과 같이 그 좋은 목소리로 외쳤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 온 산이 쩡쩡 울리는 염불을 하셨다.”(『구도역정기』 융타원 김영신 법사편)
소태산은 돈암동회관 건축 당시 낮에 공사를 끝내고 저녁 공양을 드신 후 낙산 기슭에 돗자리를 깔고 좌정한 후 오창건 정일지 두 교무와 함께 온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염불을 하였다. 돈암동회관 인근의 낙산 기슭은 소태산의 염불처요, 건축공사의 동(動)한 후에 정(靜)한 수양시간을 가진 동정일여의 도량이다.
공동연구자 방길튼·박혜현·윤지승
8월 22일 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