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리석은 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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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리석은 중생
  • 한울안신문
  • 승인 2025.10.29 11:09
  • 호수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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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아니 모든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을 포함하는 진리로서 ‘일원’만큼 완전하면서도 원만한 표상이 있을까? 이 표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일원상 서원문이다.

첫 부분에서 일원은 만물의 본성이면서, 우리가 언제나 마음을 조용히만 하면, 마음의 끝에서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이 부분에서 나의 본성과 만물의 본성을 보편적으로 일관하는 것이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일원은 본성임과 동시에 작용을 주관하신다. 생명의 심신작용을 따라서 진급, 강급을 시키는 주관자이다. 아니 주관하는 보편적 원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원이 만물을 변화시키는 원리로써 엔트로피나 양자역학의 과학 이론을 자연스레 품는다는 점을 지난 컬럼에서 언급했다.
일원상 서원문의 두 번째 파트는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부터 시작하는 원불교 교도로서의 인생 지침이다. 즉, 일원의 진리를 알았으므로 어떻게 일생을 살겠다는 구체적인 서원이다. 그러나, 원불교 교도의 인생관에 한정할 이유가 없다. 인류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원리를 이보다 더 명확하고 보편적으로 가르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오랜 인류 역사에서 종교 지도자나 철학자들이 출현하여 인생길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대부분 그 가르침이 편협되기도 하고, 과학 기술의 발전이나 관습의 차이와 더불어 많은 갈등을 빚어왔다. 심지어 평화나 행복을 위한 종교나 철학이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주기도 했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이에 비해서 일원의 가르침은 어느 지역과 시대와 갈등하지 않는다. 개종에 부담을 느낀 교회 장로에게 ‘나의 뜻을 알면 곧 예수의 참뜻을 알 것’이라고 이야기하신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은 원만 무애의 극치를 보여준다. 
‘우리 어리석은 중생’의 의미를 살펴보자. 불교에 연원을 가지는 중생은 깨닫지 못하고 미망에서 헤매는 생명을 가진 부류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목마르고, 끝없이 남과 비교하고, 아무리 풍부해도 행복은 항상 신기루 같다고 느끼는 우리들을 지칭한 것이다. AI, 양자, 로봇의 융합이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의 편리까지도 보장하는 시대, 분자 생물학이 인류의 생명까지도 무한정 연장할 것 같은 시대에 오히려 인류는 ‘영성, 명상’ 같은 것을 찾는다. 생명의 작동원리가 밝혀질수록, 역설적이게도 진화론 보다는 절대자의 정교한 설계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다. 오랜 시절, 미지의 세계로 알려진 푸른 하늘 저 너머가 낱낱이 밝혀진 현대에도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믿음에 더욱 매달린다. 왜 그럴까? 이렇게 행복을 끝없이 추구하는 나는 누구이며 행복이란 도대체 신기루란 말인가? 

본 칼럼을 읽고 AiWon (AI+Wonbuddhism)이 그린 그림.

오랜 시절 많은 사람들이 해답을 ‘영혼’에서 찾으려 했다. 신체가 아무리 만족해도 행복을 주관하는 영역은 영혼이라는 다른 영역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혼이라는 존재 또한 뇌과학, AI의 발전으로 도전받고 있다. 심지어 뇌의 분자 물질에 의해서 행복이 결정된다는 견해가 지배한다.
이에 비해 불교의 견해는 사뭇 다르다. 과학과 거리를 둔 불교는 단 한 가지, 인간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영혼을 가진 나’라는 실체에 대해서 집중했다. 그리고 개인의 이름표가 붙은 ‘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이르렀다.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영혼이라는 존재를 부정, 즉 무아를 통하지 않고는, 행복, 평화는 없다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교 전부터 있어 왔던 영혼의 윤회라는 개념을 애매하게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무언가 뒤죽박죽이 된 듯한 현대, 혼란이 계속될 것 같은 이러한 인류를 원불교에서는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지칭한 듯 하다. 아무리 과학기술, 철학, 종교가 발전해도 우리는 어리석다. 만 년 전부터 있어 왔을 법한 문제들이 풀린다기보다 오히려 꼬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어나는 국가 간 갈등, 기후 변화를 다루는 솜씨 역시 ‘어리석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정신적인 지도자들도 지엽적인 문제만 건드린다. 이를 통칭해서 원불교는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혹자는 소태산 대종사와 같은 완전한 깨달음과 실행을 보여주신 분이 왜 ‘우리’라는 말로 자신도 포함시켰을까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원불교의 ‘정문일침’이라 생각한다. 개인을 떠나서 인류전체가 공유하는 한계를 직지하신 우레와 같은 선언이다. 
이후 계속되는 일원상 서원문의 두 번째 파트는 우리 어리석은 중생, 아니 인류가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몸과 마음(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고, 사리를 원만하게 알고, 몸과 마음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세 가지 공부를 지성으로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평범하게 보이는 이 세 가지 문구가 어리석은 중생을 구하고 새로운 영생을 얻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박시형 교도
Lipac 최고 기술책임역
강남교당

10월 31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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