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동 이공주 가옥의 형태 및 구조
상태바
계동 이공주 가옥의 형태 및 구조
  • 한울안신문
  • 승인 2026.01.21 11:35
  • 호수 14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공주家(계동15-3번지, 58.7평)는 소태산 대종사와 이공주 간 편지를 주고받은 도량으로 서원과 신심과 공부심을 진작시킨 곳이다. 특히 사랑채는 소태산의 유숙처이며 예회와 야회를 본 법석이다. 
이공주는 소태산 상경 시 사랑채에 모시어 경성 회원들과 법문을 받들었고, 소태산은 폭우로 이공주家 뒷담이 무너지려 할 때 그 아래의 장독대를 부여잡고 있는 이공주에게 호령하여 담 밖으로 불러낸다.

“나는 계동 우리집 사랑채에서 대종사님을 모시고 법설을 듣게 되었고 대종사님 총부 내왕하시는 제반 비용을 담당하기도 했다.”(『구도역정기』 구타원 이공주 법사편) 
“그해(원기11년) 여름 계동 이모네집(이공주家)에서의 일이었다. 대낮에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고 평소 좀 허술하던 뒷담이 도괴倒壞될 위험이 있었다. 높은 담 밑에는 장독간이 있으므로 이모가 「아이구 장독, 장독」하며 달려가 장독을 잡고 있었다. 종사님께서 호령을 했다. 「이리 어서 나오라」 그 서슬에 이모가 놀라 달려왔다. 그와 동시에 우르르 담장이 무너져 내렸다.”(『구도역정기』 융타원 김영신 법사편)

계동 15-3 이공주家 추정 위치(하늘색원)
출처: 『대경성부대관』(1936년 조선신문사 제작)

『대경성부대관』은 1936년 제작된 것으로, 경성을 항공 촬영한 사진을 그림으로 다시 그린 파노라마 지도이다. 평면적인 지도와 달리 조감도의 형태로 제작되어 건물의 지붕 및 입체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대경성부대관』 발간사)
『대경성부대관』에서 이공주家로 추정되는 건물은 ㄱ자 형태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한 채로 붙어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안채는 안방, 사랑채는 사랑방 또는 건너방을 뜻할 것이다.
1962년 항공사진의 이공주 추정 가옥과 『대경성부대관』의 이공주 추정 가옥은 ㄱ자 형태로 비슷한 모습이다. 

1962년 항공사진. 이공주家 추정위치(노랑원)
1962년 항공사진의 북촌 일대 디지털 도면(항공사진 해상도 부족으로 일부 부정확)
출처. 정기황, 북촌:1863-1962: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터전, 서울역사박물관

이공주家는 직사각형 모양의 대지로, 폭이 짧은 쪽이 남북 방향, 폭이 긴 쪽이 동서 방향이다. 직사각형 대지에 적합한 가옥 구조는 폭이 짧은 안쪽에 안방, 폭이 긴 바깥쪽에 사랑방을 배치하는 게 효과적이다.
계동 이공주 가옥은 1969년에 재건축된 59.5㎡(18평) 목조와즙(「건축물관리대장」)과 비슷한 자리에 안방과 사랑방(건너방)이 연이어 있는 구조일 것이다. 또한 부엌은 안방과 붙어 있고, 장독대는 부엌 가까이 있는 것이 통상적이므로 통풍이 잘 되고 햇살이 잘 드는 뒤뜰에 있었을 것이다. 

계동 이공주家의 대지(청색선)와 1969년 건물 형태(노랑선) 및 장독대 추정치(빨간원)

 

계동15-3번지 건축물관리대장

 

이공주 가옥 형태와 구조는 계동 및 가회동과 중부지방의 건축도면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가회동11-131번지 건축도면
출처 : 정기황, 서울 도시한옥의 적응태
중부지방의 건축도면
출처: 조성기, 한국 중부형 민가에 대한 연구

 

이공주 가옥은 안방과 부엌 그리고 대청과 건너방(사랑방)이 ㄱ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고, 대문간에 변소와 창고 등이 붙어 있는 구조일 것이다. 

이공주家 추정 건축구조

또한 서편의 뒤뜰은 경사진 언덕(계동15-1번지)의 기슭이다. 그러므로 이공주家와 그 일대 지형은 동서 방향으로 경사져 있고 마당은 동쪽으로 열려있는 구조이다.(송인호, 1990, 도시형 한옥의 유형연구: 1930년~1960년의 서울을 중심으로)

계동과 가회동 능선도(출처: 서울특별시 도시환경개선반, ‘북촌 가꾸기 기본계획’)

계동15번지는 한창수가 대갓집이었던 1,056평(〈경성부관내지적목록〉, 1917년)을 불하받은 대지이다. 먼저 1922년(대정11년) 6월 12일에 15-2~6번지로 분할하며, 이후 15-20번지까지 분할한다. 이중 계동15-3번지는 58.7평을 분할하여 부가하며 동년 11월 7일 매매한다. 그렇다면 계동15-3번지 가옥은 1922년 말 매매이전에 건축했을 것이다. 
이처럼 계동15-3번지의 가옥은 택지분할과 함께 팔기위해 지은 절충식 도시형 개량한옥이다.(김정곤. 서울시내 개량한옥에 관한 연구. 1983) 이 가옥을 이공주(속명: 경길)는 1925년(대정14년) 9월 2일 매입한다.(계동15-3번지 구토지대장) 

계동15-3번지 舊토지대장

이공주家 서쪽의 뒤뜰과 연접해 있는 계동15-1번지(한창수 1913.06.15. 매입, 1935.10.15. 매매)는 상대적으로 높은 구릉지로, 그 옆의 가회동26번지(한창수·한상억 소유, 1935.4.16. 가회동11번지에 합필)와 함께 1935년경부터 개발된다. 이공주는 계동15-3번지를 1933년 6월 8일 매매한다. 그렇다면 매매할 당시까지 이공주家 서편은 자연 상태의 구릉지였다.
계동과 가회동의 가옥은 대갓집 및 관아의 넓은 대지 또는 임야의 구릉을 토지조사사업이 종료된 1918년 이후 조선의 친일귀족들이 헐값으로 불하받아 작은 택지로 분할한 후 팔기위해 안방 사랑방 대청 주방 등을 집적集積하고 유리창, 현관 등을 수용한 개량한옥이다. 

계동15-3과 계동15-1 및 가회동26번지 일대 지도
출처: 1929년 경성부지형명세도
계동15-3과 계동15-1 및 가회동26번지 일대 지도
출처: 1936년 대경성정도
1927년 경성부관내지적목록(서울도서관 소장)

참고로 계동15-16번지는 1925년 건축된 ㄷ자형 건물이며, 진주현·성성원 부부가 소유했던 계동100-8번지는 1930년에 건축된 ㄷ자형 건물이다. 또한 토지대장의 소유권이전 일자에 의하면 계동15-4번지와 15-13번지는 1922년에, 15-6번지는 1923년에, 15-8번지는 1924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3년 시가지 건축취제 규칙(건축 및 도시계획법) 제정으로 인해 중대형 필지는 도시형 한옥과 정형의 필지 및 직선 길로 구성된 동질의 도시조직 단위가 된다. 즉, 필지분할과 직선화 된 길에 도시형 한옥이 들어선다. 도시형 한옥은 1920년 초반에는 소규모 장인 조직들이 건축하다가 1920년 후반부터는 중소자본가들에 의해 건축된다.(조준범, ‘도시건축제도와 서울 북촌 도시조직의 변화’ 2003년)
북촌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집값 폭등 시기였다. 계동 일대는 1920년 이후 중앙고, 휘문고 등 근대적 교육기관의 등장으로 지방 유지들의 선호하는 지역이 되면서 급격한 개발이 이뤄진다. 계동2번지는 1924년 주변의 6개의 필지가 합병되며, 1929년 〈경성부지형명세도〉를 보면 중앙고 앞 일대는 작은 대지로 분할되어 도시형 한옥이 들어선다.

중앙고등학교 앞 계동2번지(출처: 1929년 경성부지형명세도)

특히 건축업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정세권(1888.04.10.~1965.09.14.)은 1920년 전후 '건양사'라는 부동산 개발 회사를 설립하여 가회동을 비롯한 북촌 및 익선동 등 경성 일대를 도시형 소규모 근대식 개량한옥으로 건축한다. 행랑방 장독대 창고 위치를 실용적으로 재배치하고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으로 된 물받이와 홈통을 다는 등 새로운 시도를 가미한다. 6인 가족이 살 수 있는 크기, 마루 개념의 거실을 중심으로 방이 둘러싸고, 내부 공간은 남향으로 하며, 위생적 화장실을 주택 내부로 들여놓는 새로운 형태의 한옥은 이후에도 북촌을 포함해 대규모 한옥 단지의 표준 모델이 된다.(나무위키)
일제日帝는 도시 가로街路 정비작업과 도로 직선화 및 택지 블록화를 통해 조선의 전통 주택의 말살과 일본인 거주 확대 및 감시와 소요를 통제하는 데 용이한 도시공간으로 조성해 간다. 이에 대항하여 조선의 고유한 골목길 문화를 간직하면서 도시형 서민용 근대한옥 지구를 북촌 등에 조성하여 민족 소통의 공간으로 지켜간다. 유리창문, 현관, 거실, 빗물받이 등을 수용한 ㄱ자 ㄴ자 ㄷ자 ㅁ자 형태로 안방 사랑방 주방 대청 현관 등을 한 공간에 집적한 절충식 한옥을 대응책으로 삼아 조성한다.(노형석·이종학, 『한국근대사 풍경』)

소태산 대종사는 이러한 개량 한옥을 수용하여 익산총부의 금강원과 영춘헌(종법실)의 한옥 과 구정원에 유리창 및 현관 등을 도입하여 개수한다. 이는 실용적이고 편리한 물질문명을 도입한 소태산의 문명수용의 자세이다. 소태산에게 계동 이공주家를 위시한 북촌 한옥은 전통과 새로운 문명을 조화시킨 문명수용 창구이다.

<참고문헌>
1. 가회동 무애연구소. OBseminar 가회동 최초 최후의 실측보고서. 2011. 저자: 이광노
2. 조준범. 도시건축제도와 서울 북촌 도시조직의 변화. 2003. 서울시립대. 박사논문
3. 김정곤. 서울시내 개량한옥에 관한 연구. 1983. 서울대, 건축 석사논문 
4. 김선재. 근대도시주택의 변천에 관한 연구. 1987. 서울대. 석사논문. 
5. 이해란. 서울시 북촌의 경관 변천에 관한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2009. 석사논문
7. 송인호. 도시형한옥의 유형연구. 1930년~1960년의 서울을 중심으로. 서울대. 박사논문

공동연구자 방길튼·박혜현·윤지승

1월 23일 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