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세종대로는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과 관련이 있고,
원불교 정신 개벽이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지난주, 원불교 법회에서 견강이 있었다. 견강은 원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발표하는 형식이다. 주제는 ‘중생의 윤회하는 것과 모든 부처님의 해탈하는 원인은 어디 있는가’라는 의두 요목이다. 원불교 교전에서 제시하는 의두요목 20개 중 하나이다. 발표한 도반은 부처는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항상 생사를 해탈할 수 있고, 중생은 집착, 분별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무언가 AI 시대에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인간이 죽은 후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는 것 자체를 고통으로 보는 시각에서 나온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세계 40% 정도의 인류가 빈곤에서 시달리는 것을 보면, 석가모니가 출현한 당시 인도 사람들의 일상이 얼마나 빈곤과 병고의 연속이었을 것인가 상상이 간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어머니들이 출산할 때는 죽음과 맞닥뜨리는 현장이었음을 기억한다.
음식, 청결, 예방을 가져다준 것은 과학 기술이다. 음식이 만들어지는 원리, 병이 생기는 과학적 원리를 이해하면서 인류는 수십 만년 고통에서 벗어났다. 크게 보면 분별과 집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약은 물질의 분자구조를 양자역학적으로 모델링해야만 만들 수 있다. 100여 년 전, 원불교의 ‘물질 개벽’은 단순하게 물질이 풍부해졌다기보다는 물질이 ‘개벽’될 정도로 과학 기술이 발전한다는 것이고 ‘과학을 만든 정신’ 역시 발전했다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정신’ 역시 수천 년 간 있어왔던 종교들의 정신에서 머무르지 않고 과학의 발전에 발 맞추어 ‘개벽’이 되어야 한다는 선언이지 않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중생과 부처’ 의두요목을 해석해 보도록 한다.
석가모니는 철학 체계를 연구했다기보다, 당시 생사의 문제, 고통의 문제에 대한 본질을 탐구했다. 원불교 용어로는 ‘사리 연구’를 한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인도 수행 방법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수행 방법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깨달음을 추구한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제, 오늘, 그리고 죽고 태어나면서 변하지 않는 ‘나’라는 실체는 없다’라는 깨달음이다. 죽어서 하늘에 가고, 다시 다른 몸으로 태어난다는 당시의 믿음에 대해서 철퇴를 가한 것이다. 즉 개벽과 같은 선언이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나’는 다른 것들과 서로 의지해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후, 인류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에 살을 붙이고, 관련된 논리적 철학 체계를 만들어 왔다. 예수는 철석같이 믿는 저 하늘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 나라가 있고 목숨과 같이 지켰던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신개벽’ 역시 과학과 충돌하고 오히려 도그마와 분쟁을 만들었다. 원수를 사랑하는 대신 서로 믿는 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더 잔인하게 상대방을 핍박해 왔다. 한편으로 인간 생활에 편리를 주었던 물질의 개벽이 오히려 대규모로 인간과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심지어 물질개벽의 정화라고 느껴지는 AI가 에너지 소모의 원흉이 되고 있다. AI를 활용한 전쟁을 잘하는 회사의 주가가 천정부지이다. 아마도 곧 AI끼리 전쟁을 하고, 죽는 것은 인간이고 지구 환경이 될 것 같다.
지난 몇 주간 전 세계를 달구었던 BTS가 광화문 세종대로에서 공연을 했다.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시작한 조선의 상징인 광화문 앞에서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성리학 출현의 배경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100년 초, 수 천년 간 믿었던 중화가 만주벌 오랑캐(금나라)에게 망하고 남송으로 천도했다. 정강의 난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조선 500년이 왜나라로 천시했던 일본에게 무너진 것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때 출현한 사람이 주자이고 성리학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理(원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따라서 ‘理(리)’를 지키면 중화는 다시 부흥한다는 주장이다. 세계의 최고 유산으로 칭송받는 한글 역시 백성을 제일의(第一義)로 보는 성리학의 정신에서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3.1 운동을 ‘개벽의 상두소리’로 여기고 더 큰 정신 개벽을 준비하자는 원불교의 정신과도 맥이 통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처는 해탈, 중생은 윤회’라는 의두요목을 해석한다. 중생의 윤회는 물질 개벽에 치여서 고통을 받는 현재의 우리들을, 그리고 부처는 ‘개벽’하는 인류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개벽을 위해서는 믿고 분하고 의심하고 성실하게 해야 하는 원불교의 ‘신·분·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불교에서 ‘의심’은 의두(혹은 화두)를 목에 거는 것이다.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한 덩어리 ‘의단’을 가져야 깨달음이 온다는 말이다. 진정한 정신개벽, 혹은 SPIN(영성 지능)의 실현은 원불교의 개벽이라는 의두를 목에 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강남교당, Lipac(주) 최고기술마케팅 책임역)
3월 27일 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