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생어해, 인과인가 변화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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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생어해, 인과인가 변화일 뿐인가
  • 한울안신문
  • 승인 2026.09.01 14:03
  • 호수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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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작용하는 은생어해, 의문이 아니라 궁극의 해결점
무상과 변화에 일체유심조 대입하고 대승과 삼학을 집성
박양서 문화사업회장
강남교당

지난 칼럼에 이어, 다시 ‘은생어해’를 집어 들었다. 은생어해와 인과에 대한 필자의 무모하다 싶었던 집착과 의문의 여정을 여러분과 공유해 보기도 하고, 그 사이 접했던 은생어해에 대한 여러가지 설명들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
은생어해·해생어은은 일원상서원문 ‘무상(無常)으로 보면~’ 문단에 등장하는데, 이 문단은, 원불교 교리의 핵심인 ‘인과’를 규정하는 참으로 중요한 곳이다.(註 원불교대사전) 그런데 난감하게도, ‘은생(恩生)·해생(害生)’의 문구는 일원상서원문 말고는 경전 어디에도 직접 언급된 곳이 없어 공부와 이해가 쉽지 않다. 
도교(道敎)의 경전 <황제음부경>에, 생자사지근 사자생지근(生者死之根,死者生之根) 구절에 은생어해 해생어은이 뒤붙어서 처음 등장하는데, "삶은 죽음의 뿌리이고, 죽음은 삶의 뿌리이며, 은혜는 해독에서 나오고, 해독은 은혜에서 나온다"로 해석된다. 즉, 삶과 죽음도 변화의 관계이고 은혜와 해독도 순환하는 변화의 한 단면이라는 도가의 사상을 압축해 놓은 것이다. 
서원문의 ‘능이성 무상’도 ‘변화’를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변화가 곧 인과인가?’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우주와 만물의 변화는 그렇다해도, 인간의 진급·강급 및 은혜·해독도 단지 변화의 한 단면일 뿐이라면, 과연 인과의 의미는 무엇인가. ‘은혜를 심어야 은혜가 나오는’, 털끝 호리도 틀림없다는 과보의 가르침과 같은 것인가. 어찌 연결되는가.
이런저런 설법과 공부를 통해, 범불교적으로 이어온 인과론과 연기론(즉. 변화)의 오랜 충돌과 치열한 논쟁에 대하여도 조금 알게 되었다. 인과는 연기의 일부일 뿐이다, 또는 연기는 있어도 인과는 없다, 또는 일대일의 과보/인과는 연기론이 아니다 등. 
한편, 원불교에서는 주로 ‘은·해’ 구절을 취사의 바탕으로 다루는 설법이 주를 이뤘다. 은혜와 해에 너무 끌리지 말자, 겸양과 감사의 마음을 갖고 살자, 항상 은혜를 발견하여 진급하는 삶을 살자, 당장은 해가 되고, 어려운 일도 잘 이겨내면 은혜가 된다 등. 설명은 많았지만, 인과에 대한 설명인지, 취사의 가르침인지는 잘 구별되지 않았다. 
두둥! <대종경> 인도품 17장으로 이끌어 주신 교무님이 계셨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지어 놓은 그 복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을 지은 그 마음이 죄를 짓는 마음으로 변하기도 한다 함이니, 범상한 사람들은 남에게 약간의 은혜를 베풀어 놓고는 그 관념과 상(想)을 놓지 못하므로 저 은혜 입은 사람이 혹 그 은혜를 몰라 주거나 배은망덕을 할 때에는 그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몇 배나 더하여 지극히 사랑하는 데에서 도리어 지극한 미움을 일어내고, 작은 은혜로 도리어 큰 원수를 맺으므로...공부하는 사람이 이 도리를 알고 마음을 응용하여야 은혜가 영원한 은혜가 되고 복이 영원한 복이 되어 천지로 더불어 그 덕을 합하게 될 것이니...”  (인도품 17장)
그 위에 다시 서원문을 정독하여 ‘심신작용을 따라’를 붙여 읽음으로써, 마음이 작용하는 은생어해는 의문이 아니라 궁극의 해결점이라는 이해를 얻었다. 대종사님은 인과도 변화의 한 모습일 뿐이지만, 그 변화를 어떻게 소화하는가 ‘마음에 따라’ 업(業)의 모습이 정해진다는 법문이다. 무상과 변화에 일체유심조를 대입하시고 취사의 기본을 설하시어 대승과 삼학을 집성하셨다.
필자의 바탕 약하고 조급했던 공부는 긴 길을 돌고 헤매었지만, 이제 ‘은생어해’와의 씨름은 마감을 해도 될 듯하다. 

9월 4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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