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연구회 경성지부 회관 개수(改修) 및 식당채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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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연구회 경성지부 회관 개수(改修) 및 식당채 신축
  • 한울안신문
  • 승인 2026.10.20 15:01
  • 호수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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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연구회 돈암리회관(법당채) 신축 낙성 후 이완철 경성출장소 교무는 “이동진화가 뿌리를 숨기고 이공주는 줄기와 가지를 배양시키고, 지환선과 여러분은 잎과 꽃을 피게 한다.”(〈회보〉 제7호, 경성지부 신축 낙성에 제하여)라고 유공자들을 평한다. 몇 달 뒤인 원기19년(1934) 4월 28일 불법연구회 총대회에서 돈암리회관은 출장소에서 지부로 승격된다.

앵두나무골 경성지부는 회관(법당)과 종각 그리고 사무실과 식당채가 있었다. 이중 회관(법당)과 종각은 신축이며 사무실과 식당채는 기존의 초가였다. 원기18년(1933) 11월 3일 신축 낙성한 회관(법당)은 몇 년 후 난방(온돌) 및 누수에 문제가 발생하자 박창기가 원기21년(1936) 10월경 보수 공사 비용(300원)를 대어 1개월간 개수하며, 기와지붕 수리는 지환선이 비용(50원)을 지원한다. 이때 회원들이 십시일반 의연한 비용(50원)은 회관 입구의 비탈길을 정비하고 다리(架橋)을 가설하는 데 사용한다.(〈회보〉 제31호, 경성지부 근황) 

원기24년(1939), 정일지가 경성지부 서기로, 김삼매화가 감원으로 근무할 때의 경성지부 식당채와 관련된 일화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우리 회상에 특색 있는 도인이 많이 있어 다 후세 수도인의 모범이 될 만하다.”며 그 중 ‘정일지의 정결’을 제시한다.(『대종경선외록』 교화기연장 2절) 이처럼 평소 위생 관념이 철저한 정일지는 식사만 끝나면 곧바로 밖으로 나와 찬 바람 쐬기를 좋아하였다. 경성지부 식당채에 배어 있는 김치, 된장 등 퀴퀴한 냄새에 역겨워한 것이다. 이러한 정일지의 행동에 대해 김삼매화는 좀 못마땅해하고 거슬렸다.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자 김삼매화는 자초지종을 고하면서 “식당채를 좀 잘 지었으면 좋겠어요. 깨끗하고 공기도 맑은 방에서 종사님의 진짓상을 올리고 싶어요”라는 의견을 표한다. 이에 소태산은 정일지를 불러 정결에 집착하여 밥 한 그릇의 소중함과 집도 없이 만주 벌판에서 유랑하는 동포와 독립운동가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각성토록 한다(손정윤,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일화집』).

원기24년(1939) 이후 회원이 늘어 식당 신축이 현안으로 떠오르자 황정신행이 비용을 전담(3,600원)하여 원기24년 8월에 유종식의 헌신적 공사로 식당채 12칸을 신축 완공하며, 남자 숙소도 기와지붕으로 교체하고 앞뒤로 석축을 쌓는다(〈회보〉 제54호 ‘각지상황’, 〈회보〉 제59호 ‘지방소식’, 『원불교72년총람』 서울교당 편). 황정신행은 그 후로도 보이지 않게 식당채의 살림살이를 후원한다(『황온순, 천성을 받들어 90년』). 

 

경성지부 돈암리회관(상)과 이전한 삼군부 총무당(하)
1972년 항공사진(출처: 국토정보지리원)

1972년 항공사진(적색원)을 보면 ‘ㄱ’자형 돌출형 건물과 그 옆에 건물 2채가 나란히 이어져 있다. 돌출형 건물은 경성지부 회관이라면 연접해 있는 윗 건물은 사무실채와 식당채로 보인다. 여러 기록을 미루어보아 경성지부는 회관(법당), 종각, 생활관(사무실채, 식당채), 창고 그리고 정원과 우물, 울타리 아래에 변소(출처: 손정윤, 신도들의 성금, 『원각성존소태산일화집』)가 있었고, 산비탈에 석대(石臺)와 석축을 쌓았으며, 대문에 문패와 간판이 있었고(〈조광〉 1936년 6월호) 대문 앞 바위에 새긴 ‘수양원입구’라는 표식(〈회보〉 제7호 ‘경성지부 신축 낙성에 제하여’)이 있었다. 
그리고 회관 들어오는 길이 비탈길이었고 그 길을 수리하며, 그 앞에 흐르는 계곡을 건너는 다리(架橋)를 세웠다.(〈회보〉 제31호, 경성지부 근황 “기타 회우의 거금 50원으로 도로수선 교량가설의 역을 필(畢)하였는데”)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 원도(原圖)
(출처: 국가기록원-토지조사사업관련 지적기록물)

위 지도 510번지(돈암리회관) 경계를 따라 ‘구(溝)’(노란원) 표시가 있다. 이 도랑(溝)을 따라 앵두나무골과 낙산 간에 길이 이어져 있고, 낙산으로 가는 길은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회관(법당)과 생활관(식당채 등) 사이의 종각은 『예전』(원기20년 발행) 설법례에 따른 불법연구회 최조의 종각으로 여겨진다. 이 종각의 상부에 16관의 범종이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줄을 당겨 친 듯하다. 이 범종은 일제에 의해 전쟁 군수용으로 강제 공출당한다.
종각과 관련된 일화이다. 
「사산 오창건 선생은 신축회관을 거의 준공할 즈음에 종을 달아야겠다 생각하고 하루는 종을 사러 종로에 갔다. 그랬더니 종파는 가게라곤 도무지 보이질 않아 종일토록 헤매고만 다니다 빈손으로 돌아왔다. “선생님, 종일 어디 갔다 왔어요?” “아, 종로에 종사러 갔더니 없더만.”」(『구도역정기』 융타원 김영신 법사편) 

〈회보〉 제60호(시창24년 11월호)에 실린 ‘음조와 음해의 출처’ 법문인 『대종경』 인과품 15장은 1933년에 돈암리회관 건축 시의 법문이 아니라 황정신행의 후원에 의해 1939년에 식당채와 남자 숙소를 신축 및 수리하는 공사 중에 기연된 법문으로 여겨진다.
또한 경성지부 식당채 신축은 『대종경』 교단품 35장과 관련 있다. 무념보시(無念布施)하면 그만인데 그 공덕을 존숭하고 표창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발생한 기연처이다. 황정신행은 경성지부 식당채 건축을 할 때 무명으로 희사한다. 〈회보〉와 〈사업보고서〉에 특지가로만 표명했던 것이다. 황정신행은 이후 교단사업을 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예수교회에서는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성경 말씀이 있는데 교단에서는 일일이 사업성적이라 하여 기록을 했던 것이다.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께 여쭈었다. “왜 여기서는 사업한 것을 기록합니까? 부끄러운데요.” “사업하는 사람은 무상보시로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고 또 격려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오.”」(『구도역정기』 황정신행 법사편)
황정신행은 소태산의 말씀에 다면적인 뜻을 각성한다. 단면적인 생각으로 판단하고 처리할 일이 아님을 자각한다.

원불교서울성적지연구회  방길튼·박혜현·윤지승

10월 23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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